2021, 8.17
요즈음 전시회나 출판물들을 보면 추상주의가 가장 핫한 이슈가 되는 가운데, 특히 영적 추상주의의 부활이 눈길을 끈다. 힐마 아프 클린트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관심이 그 대표적 사례다.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아프 클린트의 전시는 구겐하임 사상 최다 관람 기록을 세웠다. 이 전시회는 또한 최초의 순수 추상주의 역사를 말레비치, 칸딘스키의 이전인, 적어도 1907년으로 더 앞당겼다.
영적 추상주의의 부활
다른 초기 영적 추상화가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2020년 런던 드로잉 룸에선 26인 화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유령과 함께: 아티스트가 영매가 되어’(Not Without My Ghosts: The Artist as Medium)가 열렸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강력하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그리고 조지아나 호튼의 작품들이다. 호튼의 이 작품들은 1860년대에 제작됐다. 2019년 피닉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린 ‘아그네스 펠튼: 사막의 초월주의자(Agnes Pelton: Desert Transcendentalist)’ 전시는 영적 세계에 몰두한 아티스트의 작품을 보여준다. 반추상적 작품들에선 별과 꽃, 풍경이 암시적으로 묘사되면서, 유령이나 심령 같은 이미지가 빛나고 있다. 이 전시는 2020년에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도 열렸다.
영적 추상주의의 부활은 훨씬 이전에 시작됐다. 2005년 캐더린 드 제거는 뉴욕 드로잉 센터에서 ‘3 x 추상화: 새로운 드로잉 기법’(3 x Abstraction: New Methods of Drawing) 전시회를 기획했다. 3명의 추상화가 아프 클린트, 엠마 쿤즈, 아그네스 마틴을 하나로 묶는 전시회다. 이보다 20년 앞서 기념비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미술에 나타난 영적요소, 1890-1985 추상화(The Spiritual in Art: Abstract Painting 1890–1985)’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의 모리스 터치맨이 기획했다. 매우 두툼한 카탈로그에는 아프 클린트와 아스네스 펠튼도 소개되고 있다. 터치맨은 영적 추상주의를 소개하려는 자신의 시도가 최초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미국 서부 해안 도시들이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에 특히 호의적이었지만 동부 해안도 배타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일례로 미니멀리즘의 성지인 디아예술재단(Dia Art Foundation)의 경우, 설립자 하이너 프리드리히와 필리파 드 메닐(수피교로 개종)의 영향으로 신비주의 수피즘(Sufism) DNA를 갖고 있다.
터치맨이 지적했듯, 아프 클린트와 펠튼의 신지학(Theosophy)은 많은 초기 모더니스트들, 특히 몬드리안과 칸딘스키도 공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가장의 주목할 만한 전시는 마이애미 수퍼블루(Superblue)에서 제임스 터렐, 메리 코스, 닉 케이브, 자콜비 새터화이트, 팀랩(teamLab) 등이 선보인 첨단기술을 이용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구사마 야요이의 거울의 방(mirror room)과 같이, 황홀하고 쌍방향적이며 몰입적 체험을 할 수 있는 이 전시는, 역사적으로 행해진 신성한 의식(sacred ritual)과 닮아 있다.
이쯤 되면 ‘왜 지금 영적 추상주의에 대한 관심이 뜨겁나’ 하는 질문을 갖게 된다. 경고인가? 문명이 쇠퇴할 때면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다. 아니면 지금 세속 인본주의가 처한 곤경을 상징하는 걸까. 세속주의는 너무 유럽적이고 우쭐댄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런가 하면 세속주의는 프랑스에서 문화 위기의 한 가운데에 있다. 프랑스 철학의 토대인 라이시테(laïcité, 정교분리)는 무슬림 인구 증가라는 현실에 봉착해 있다. 좌파는 다원적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가톨릭(그리고 반유대주의)의 오랜 전통 때문에 상황은 복잡하다. 미국의 경우에도 좌파에서 세속 인본주의에 대한 반기가 일어나고 있다. 우파의 경우, 당연히 세속 인본주의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같은 기묘한 동거는 전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카멜의 <추상미술: 글로벌 역사>
카멜 교수의 저서 <추상미술: 글로벌 역사> (테임스 & 허드슨, 2020)는 훌륭한 안내서다. 이 책은 “추상미술은 언제나 현실 세계의 경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아프 클린트의 작품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으며 3장 우주론(Cosmologies)에서 다뤄지고 있다. 행성 간 우주여행에 관심을 가졌던 말레비치, 바우하우스 교수로 바우하우스 기초과정에 신비주의 의식을 도입한 요하네스 이텐도 우주론에서 다뤄지고 있다. 우주론 하부 섹션인 ‘별자리표(Star Charts)’에선 잭슨 폴락의 ‘북두칠성의 반영(Reflection of the Big Dipper, 1947)’ 그리고 데이빗 스미스의 조각 ‘스타 케이지(Star Cage, 1950)’가 다뤄진다.
카멜은 주제를 정의할 때 상당한 포용성을 보였다. 그는 추상과 구상이 이분법적 관계는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그는 많은 구상 작품도 다루고 있다. 제 1장, ‘인체(Bodies)’에는 ‘댄서들, 운동선수, 시인들’, ‘노동자들과 기계들’, ‘배아와 덩어리들', ‘토템’ ‘존재들’ (자코메티와 루이즈 부르주아) ‘피부와 피하지방’ ‘장기와 유체(키리 스미스, 린다 벤글리스, 테리 윈터스, 캐롤 던햄) 등의 하부 섹션이 있다.
카멜은 자신의 의도는 내적 필요성(inner necessity)과 영웅적 개인에 주목하는 헤겔주의적인 진보적 미술사를 흔드는 것이라고 밝힌다. 영웅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언제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카멜의 <추상미술: 글로벌 역사> 추상과 비추상의 경계를 완화했을 뿐 아니라, 그 외연도 넓히고 있다. 거의 모든 장에서 노인이 된 (혹은 타계한) 백인 남성들이 먼저 등장하지만, 그 뒤에는 여성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카멜은 장식예술, 사진, 행위예술, 기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자코메티에서, 재스퍼 존스, 로버트 모리스를 다루고, 댄서 시몬 포티, 그리고 마이클 프라이드와 그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이정표적 에세이를 다룬다. 다양한 예술가들과 주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카멜만 외연 확장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뉴욕현대미술과(MoMA)은 2012년 기획전 ‘추상주의의 태동, 1919-1925(Inventing Abstraction, 1910-1925)'을 열었을 때만 해도, 이 전시 기획자들은 추상주의가 탄생한 시점과 장소에(서부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이라는)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후 MoMA는 이를 수정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보여 왔다. 2019년에는 기획전 ‘남미 모더니즘: 추상으로의 여정’(Sur Moderno: Journeys of Abstraction)을 선보였다. 2020년 초 뉴욕 대 그레이 아트 갤러리는 ‘아랍세계에서 추상의 태동, 1950년대부터 1980년까지’(Abstraction from the Arab World, 1950s-1980s)를 기획했다. 멧 브로이어(Met Breuer, 뉴욕 메트로 뮤지엄 분관) 두 개관전 중 하나는 인도 추상주의 선구자 나스린 모하메디를 소개한 것이다. 이후 멧 브로이어는 미리나르니 무케르지의 섬유 조각, 주목받지 못했던 잭 휘튼의 조각품, 그리고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브라질 추상주의 예술가 리지아 파페를 소개하는 전시를 열었다.
추상주의에서 젠더 담론이 주목 받은 건 그 이후다. 많은 여성들에게 미니멀리즘 형식이 보여주는 엄격한 금욕성은 환원적 추상주의가 남성의 게임임을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선구적 바디 아티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엘리너 앤틴은 “추상화는 소외된 대상(alienated object)”이라고 비판했다. “추상화의 가치는 일련의 복잡한 문화적 약속과 책무에 의해 결정되면서, 인간의 관심이나 흥미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추상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얼마나 동떨어져 있느냐’ 하는 것이다. 60년대와 70년대 초, 여성 추상 예술가들은 이 같은 소외성에 저항하기 위해 직물, 도자기 등 수공예와 연관이 있는 소재나 과정을 도입했다. 아울러 복잡한 패턴과 장식을 선호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제 이 같은 노력들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미니멀리즘 초창기에도 작가들은 수작업을 통해 금욕적 엄격성을 완화하기도 했다. 아그네스 마틴이 뒤늦게 주목을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화가의 역할은?
성향이나 연배 등으로 볼 때 마틴은 추상주의의 퀴어링(queering)을 지지하진 않았다. 그러나 캐리 모이어(Carrie Moyer)는 퀴어링을 지지했다. 모이어는 얼마 전 DC 무어 갤러리 사이트에서 구상화가 데이비드 험프리와 비대면 대화에서 “모더니즘은 아직 존재한다. 여성 동성애자로서 나는 아직도 모더니즘의 금기(don't)에 반발한다”라고 말했다. 험프리가 모이어의 작품은 “강력한 그래픽이나, 공개적 선언과 같다. 노골적이다”라고 지적하자, 모이어는 동의했다. “관람자들과 부드러운 순간을 나누는 데는 관심이 없다”며 “그것보다는 훨씬 크게 외치는 것(exclamatory)”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화 전반에서 모든 것이 도구화 됐다”며 그렇다면 “화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티아스터 게이츠는 (화가들을 위한 건 아니지만) 추상주의자들을 위한 답변을 제시한다. 게이츠는 공예와 사회적 실천의 융합을 주창해온 인물이다. 도예가인 게이츠는 자신의 작품도 창작하지만, 공동체에 기반을 둔 도예 워크숍을 만들어 시장성을 가진 작품도 만든다. 이런 협업 프로젝트에서는 주도적 아티스트의 역할이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적어도 주도적 아티스트의 역할이 분명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클린트와 호튼의 작업에도 같은 지적을 할 수 있다. 망자의 영혼이 그들의 작품을 주도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말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심령의 자동현상(psychic automatism)에 의존한다고 한 초기 초현실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고하는 의식(thinking mind)이 주체가 아니라면, 누가 혹은 무엇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인가? 예술가들이 무의식을 어떻게 해석했느냐는 것은 중대하고, 심오한 질문이다. 추상과 구상을 가릴 것 없이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손이 의식과는 별개로 움직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미술사학자 크리스타 로빈스는 자신의 신작 <작가로서의 미술가>(시카고 대 출판부, 2021)에서 ‘작가의 죽음(death of the author)’으로 잃었던 역할을 미술가들에게 돌려주고 있다. 해럴드 로젠버그가 제기했고, 잭 트월코프, 헬렌 프랑켄탈러, 샘 길리엄 등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행동(action)’에 주목한다. 그러나 로빈스의 시도는 추상화에서 개인적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아니다. 로빈스는 예술적 행동(artistic action)이란 현대 미술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작가가 어떤 위치를 점하느냐 하는 것의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로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작가’는 내부적, 감정적 경험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로빈스는 결론에서, 추상 표현주의자라고 스스로 규정한 아그네스 마틴의 경우 “(그리드 제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냈고,” 여기에는 당대 동료 작가들이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연구와 분석의 대상은 작가주의(authorship)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마틴의 그리드가 갖는 의미는 그것을 제작하는 행위에 있고, 거기에는 물리적 프로세스 뿐 아니라 “마음과 몸의 관습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 관객, 비평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상황에서, 누구의 의견이 중요한 걸까하는 의문이 최종적으로 제기된다. 뉴뮤지엄에서 최근 열린 전시회 ‘비탄과 불만: 아메리카의 예술과 애도’ 리뷰에서 피터 셸달(Peter Schjeldahl)은 줄리 머레투와 마크 브래드포드 격렬한 묘화법, 빛나는 컬러, 장엄한 스케일에 열광했다. 셸달은 정체됐던 미국 현대 미술에서 60년 만에 다시 나타난 획기적 돌파구라고 평가했다. 반면 홀랜드 코터는 뉴욕타임스 게재 비평에서 이 그림들 이면에 숨어있는 정치적 내용에 주목했다. 브래드포드의 경우, 1965년 왓츠 폭동 이후 나온 로스엔젤레스 흑인 지역에 대한 정부의 감시용 지도이다. 머레투의 경우는 “반쯤 숨어있는” 2017년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열린 백인 우월주의 시위 이미지다. (필자 등) 많은 관람객들은 이 숨겨진 이미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면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더 생생하게 하건, 적어도 더 복잡한 의미를 갖게 한다.
전시회의 카탈로그가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이것이다. 순수한 형식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학문적 표현들에서 눈을 돌리면, 정치적 사고, 사회 및 문화적 역사,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수 있다. 길리엄에 관한 2020년 에세이에서 프레드 모튼은 오네트 콜맨(재즈 색소폰연주자)의 리듬, 빨래를 너는 흑인 여성의 “보이지 않는, 은밀한 노동”, 그리고 길리엄의 “알록달록, 펄럭이는 텐트의 물결”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모튼은 또한 “길리엄의 작품에서 어떤 것도 해석해 내려 하지 않으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사색이 이어지고 뜻밖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서, 결국은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경과학자이자 열렬한 미술 애호가인 에릭 캔들은 의도치 않은 생각(unthought thinking), 즉 의식 아래서 이뤄지는 사고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연상적이라고 말한다. 환원적 추상주의와 시각적 인식에 관한 짧은 책 <미술 환원주의와 뇌 과학: 두 문화를 잇다>(컬럼비아 대 출판부, 2016)에서 캔들은 인간의 시각 체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 있는 형태를 찾아 간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보가 최소한인 상황에서, 시각 체계는 가장 유사한 것을 찾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