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Contemporary Art Became a Vibe
ArtReview
2021.8.20
전시회에서 작품들은 시각적 ‘무자크’가 된다
한해에 몇 번이나 보게 되는 유형의 전시회가 있다. 그런 류의 전시회는 으레 잘 꾸며진, 천고가 높고 사면이 온통 흰색인 전시실에서 열린다. 때문에 관객들은 할리우드 영화 속 갤러리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모호하며, 또한 어딘가 특색이 조금은 결여된 대형의 추상 작품들은 영화 뉴욕스토리(New York Stories)에서 화가 라이오넬 도비(닉 놀테가 연기함)가 그렸던 시대착오적 추상 표현주의 작품을 연상시킬 때도 있다. 과도하게 화려한, 희화적 구상화들, 그리고 우아한 둥글납작한 조각들도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소품처럼 보이면서 배경에 묻혀 버린다, 때문에 관객이 작품을 분석하려 해도 작품에 계속 집중하기가 어렵다. 전시 작품들은 시각적 무자크(muzak, 상점·식당·공항 등에서 배경 음악처럼 내보내는 녹음된 음악)가 되는 것이다. 이 시각적 무자크는 관객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며, 관객을 평온하게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해서 적극적 관여나 참여로부터 관객이 잠시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이 같은 전시회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어렵거나 딱딱하지 않고 관객의 관심을 한곳에 붙들어 놓지 않으려는 경향이 점점 예술과 문화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작가 카일 차이카는 '앰비언트 TV(ambient TV)'가 새로운 현상이 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했다. 차이카는 넷플릭스에서 2020년 10월부터 방영된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 리뷰에서, 이 드라마는 “핸드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도 시청할 수 있는” 배경과 같은 ‘앰비언트 TV'라고 말했다. 차이카는 또한 틱톡에서 화려한 분위기를 중시하는 ‘바이브(vibes 느낌, 분위기)’가 하나의 대세가 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앰비언트’ 음악(분위기와 음색을 중시하는 음악)이 등장한 건 70년대지만, 현대 팝 음악도 앰비언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간 팝 음악은 쉽게 들을 수 있는 사운드가 되면서, 우리가 다른 일을 하면서도 배경 음악처럼 들을 수 있게 됐다.
이같은 움직임은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팬데믹으로 고통 받는 관객이나 감상자들이 (작품이나 음악에) 더 쉽게 다가서도록 하려는 의도적 배려다. 이미 큰 고통을 겪었고, 집중하고 몰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이같은 추세는 몰입형 전시에서 더 일반적이다. 몰입형 전시에서 관객은 자신 외에는 집중할 포커스가 없으며, 따라서 이리저리 거닐면 자신이 원하는 속도에 따라 스스로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쿠사마 야오이 전시회에서 거울을 통해 반사하는 도트(dot)들과 호박들 사이에 서 있다면, 아니면 팀랩(teamLab) 전시회에서 소용돌이치는 구름과 디지털 화환에 둘러싸여 있다면, 웬만해선 긴장을 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전시 작품에 어떤 기술적 혁신이 있는 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집중이 아니라 분산된 관심, 즉 ‘신체적 인식(somatic register)’이라는 개념이다. ‘신체적 인식’은 시각 예술이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개념(체험 미술의 선구자인 제임스 터렐은 예외다)이다. 그러나 이제 분산된 관심과 신체적 인식이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앞으로 테크 자본의 후원을 받으며 계속 진화해 나갈 것이다.
독자적인 아날로그 종이 책 시대에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면, 서로 연결된 현재와 미래에는 민첩하고, 수시로 방향 전환이 가능하고, 즉흥적이며 연상적 인식이 요구된다. 라이언 트레카틴의 2000년에서 2010년까지 작품들, 카미유 앙로의 ‘Grosse Fatigue'(2013)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같은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이미 등장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고 있는 이 같은 열광은 이례적이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시기를 나타내는 마커(marker)와 같은 것일 수 있다. 예술이 교육의 장이 아니라 피난처가 될 수 있고, 적어도 분산된 관심들이 우리를 부드럽게 위로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최상의 목표는 이전과는 다르다. 더 이상 지속적 관심의 대상되면서, 관객들에게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ArtReview에 게재된 Martin Herbert의 논평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