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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와 비평][GB24] (10) 아나스타시아 소수노바 Anastasia Sosunova

김윤비

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전시 참여작가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작품 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발 딛고 선 땅을 이해하기: 아나스타시아 소수노바의 〈DIY〉(2023)


김윤비

1. 
미술과 사회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진부할 정도의 진실이 된 것 같다. 반세기 전 미술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art)를 주창하며 미술과 사회정치 간의 복잡성을 읽고자 시도했던 마르크스주의 미술사학자 T.J. 클라크(T.J.Clark, 1943-)가 “그 어떤 미술사도 다른 종류의 역사들과 무관하지 않다” 역설했던 것이 무색하게 말이다.1) 우리는 이제 어떤 예술가도, 어떤 작품도 사회라는 더 큰 틀 속에서 읽어낼 수 있으며, 예술가들 역시 사회적 맥락을 자신의 작업에 끌어들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43-)은 자신의 저서 『문화란 무엇인가 Culture』(2016)를 통해 “인간 역사 중 어떤 생산 양식도 자본주의만큼 혼종적이고 포괄적이며 이종혼합적인 것은 없었다”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재차 강조하면서, 자본주의가 자신의 물질적 목표를 위해 한층 더 가혹하게 도구화되었음을 지적한다.2) 다원성, 차이, 주변성에 대해 귀 기울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천이 귀중한 성과를 만들어 냈음은 분명하지만, 더 근본적인 물질적 영역, 즉 자본주의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세계에 대한 불신과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200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동시대 미술은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이글턴에게 삶의 방식으로서 문화는 대개 관습(혹은 습관)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이는 예술이라는 의미에서의 문화를 모델로 삼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3) 즉 그는 문화를 가능케 하고 필연적으로 만드는 물질적 조건을 어루만져 사회, 정치, 경제적 활동들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술에서 본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미술사가 테리 스미스(Terry Smith, 1944-)에게서 일견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의 동시대 미술은 완전히 종합될 수 없는 이율배반에 종속될 운명에 처했지만, 스스로를 종료할 수 없는 동시대의 복합성을 열린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그러한 자기모순을 지속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가, 어떤 방식으로 이 땅을 이해하고 있는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될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2. 
리투아니아 빌뉴스(Vilnius)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 예술가 아나스타시아 소수노바(Anastasia Sosunova, 1993-리투아니아)는 일상생활 속의 미시사를 기반으로 광범위한 사회문화 및 정치적 현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비주얼 아트와 조소를 전공한 그녀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비디오, 설치, 조각, 그래픽 아트 등 다양한 분야를 오가는 작업을 선보여 왔으며, 이는 언뜻 포스트모더니즘이 행했던 형식적 실천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은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우리 사회의 미묘한 물질적 관계, 즉 더 큰 이야기의 얽힘을 따라가며, 그 사이를 넘나든다. 

소수노바의 작업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독실한 리투아니아 정교회(Lithuanian Orthodox Church) 집안에서 자란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한 만큼, 리투아니아가 겪어온 혼란스러운 역사를 빼놓고 그녀의 작업을 논하기는 어렵다. 18세기 후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분할 이후부터 독립 투쟁 및 독일과 소련의 정권 쟁탈 전쟁으로 극히 혼란한 상황을 겪은 리투아니아는 1990년 3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1991년 9월이 되어서야 유엔 가입과 함께 실질적 독립을 이룩했다. 이러한 역사에서 비롯된 리투아니아인들의 반러시아적 민족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현재 리투아니아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는 소련 측에서 오랜 시간 교구의 권위를 유지해 온 리투아니아 정교회이다. 작가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해 온 보수적인 종교적 가치와 민족주의, 새롭게 유입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충돌 및 적응기 사이 혼란스러움이 작가의 작업적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은 자신이 자란 리투아니아 변방 지역(Ignalina)에서 겪은 문화적 차이와 정체성의 균열에서부터 시작되며, 이는 곧 공동체와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고, 해체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독실한 리투아니아 정교회 집안 내에서 리투아니아인으로서 성장한 그녀는 자신이 세상과 관계를 맺어온 방식을 더듬어 나감으로써 그녀가 영유해 오던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상을 일상으로 작동할 수 있게 했던(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는) 더 큰 맥락에 도달한다. 그녀는 리투아니아 영토에 새겨진 복잡한 역사와 그 위에서 자라난 자신의 정체성을 소련과 리투아니아의 문학적, 사회적, 종교적 레퍼런스를 교차시켜 제시하는 한편,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인지하기 힘든 요소, 가령 음식이나 단어, 가구에서부터 언어, 국경, 정치 체제의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상태를 읽어낸다. 

3.
제15회 광주 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2024)의 본 전시실 2 갤러리 “부딪힘 소리(Feedback Effect)”에 포함된 소수노바의 설치 작업 〈DIY〉(2023)는 DIY 가구로 완성될 도구와 부품으로 가득 찬 트롤리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도 1). 마치 거대한 선반의 뼈대만을 남겨놓은 것처럼 투박하게 세워진 철근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물들이 테이프로 마구 고정되어 있다. 얼기설기 얽힌 철근들은 본래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녹슬었지만, 여전히 그 뼈대는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철근 위에 놓인 몇몇 고물 위에는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이미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문을 당하는 그리스도를 묘사한 희귀한 기독교 정경에 대한 패러디로서, 노동이 금지된 일요일을 의미한다. 철근에 산발적으로 걸려있는 네 대의 모니터 앞으로 자리를 옮긴 관람자가 모니터 속 영상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두 대의 감시 카메라는 철근 속에 몸을 숨긴 채 관람자를 감시한다.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벽처럼 세워진 철근 사이에 선 관람자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영상 속 여러 주인공들의 모습과 나레이션 사이 미묘한 긴장감과 기시감에 빠져든다. 

영상 속 나레이터는 1989년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건축 자재 상점이 큰 인기를 끌었던 1990년대 초 리투아니아의 모습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리투아니아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로 진입하던 당시 DIY 기업 케스코 세누카이(Kesko Senukai)의 등장은 그야말로 선구자와 같았다. 특히 케스코 세누카이의 창립자이자 영적 지도자인 아르투라스 라카우스카스(Artūras Rakauskas, 1972-)는 『글로벌한 정신과 감각적 사고 Globali jausmo proto dvasia』(2014), 『기업가 정신 Business Spirit』(2002) 등 자본주의, 신지학, 기독교적 접근법을 혼합한 영적 교리를 설파하는 독립 서적을 다수 출판했으며, 리카우스카스의 이러한 가르침은 1990년대 해당 지역이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과도 공명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 케스코 세누카이를 비롯한 이와 같은 1인 종교적 아이디어, 상징 및 가치는 기업 구조, 미학, 직업윤리, 심지어 상품 배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비즈니스에 적용되었다. 영상 속 나레이터의 말처럼,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정말이지 신은 곧 풍요였다(God is abundance). 

지역 전체가 시장 경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는 혼란한 역사로 인해 튼튼한 문화적 기반이 없던 이들에게는 또 다른 영역으로, 즉 자신의 문화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과 같았다. 그러나 작품은 우리의 시선을 희망적인 미래로 이끌지 않는다. 누군가의 일기를 연상시키는 나레이터의 목소리와 영상 속 주인공들의 모습 뒤로 제국과 같은 명성을 갖게 된 케스코 세누카이를 암시하는 배경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영상과 나레이션 사이 미묘한 긴장감은 관람자가 주인공들이 차지하는 중심이 아닌 화면의 여백에 시선을 돌리게 하며, 이러한 효과는 산발적으로 설치된 모니터와 철근 구조물, 양옆에서 관람자를 감시하는 두 대의 카메라로 더욱 강화된다. 여전히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는 보수적인 종교적 가치, 1990년대 이후 종교에 준하는 권력을 갖게 된 DIY 기업 케스코 세누카이, 새로운 삶을 향한 리투아니아인들의 열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시하는 국가권력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선 철근 사이에서 끊임없이 교차한다. 

〈DIY〉는 ‘DIY 도구로 가득 찬 트롤리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어 소수노바가 가진 분열적인 정체성,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혼란했던 역사와 그 위에 새겨진 국가라는 더 큰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떤 추종자도 끌어들이지 않는 DIY 체인과 창시자라는 단 한 사람을 중심으로 추종자를 끌어들이는 영적 시스템, 즉 제도권 종교의 결합은 언뜻 이질적인 듯 보이지만, 그 연결은 ‘DIY(Do it yourself)’의 개인주의적 측면에서 강화된다. 이중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혹은 둘 다 택할 수도 있다) “스스로 만들어지고 설계된 개인은 자신만의 은신처에서 자신만의 사적인 숭배에 빠져든다.”4) 

하지만 만약 관람자가 종교적 기반이 있다고 하더라도, 철근 위에 놓인 몇몇 오브제 위에 새겨진 종교적 이미지를 바로 알아채기는 어려울 것이다. 감시 카메라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소수노바의 작업이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은유이자 질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설치 공간 안에서 부딪히는 모든 요소들이 일종의 기시감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관람자가 종교적 암시를 알아챌 수 있든 아니든, 감시 카메라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든 아니든, 그것들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에 알게 모르게 존재하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때로는 조종한다. 그렇게 관람자는 인지한다. 자신이 스스로 만든(DIY) 세속적 이데올로기 안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즉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만들어 낸 것이 종교적 신념인지, 혼란스러운 사회인지, 우리 자신의 열망인지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 

〈DIY〉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위치시키고 외부를 용납하지 않는 서사 시스템에 대항하여 설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시스템을 타파하자는 강력한 시위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온 맥락을, 내가 발 딛고 선 땅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설계해 온 세계를 해체하고, 그것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작가는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 가까워진다. 설령 그것이 그로부터 자신을 밀어낼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리투아니아라는 먼 땅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곧 수많은 ‘나’의 이야기가 된다. 작가는 이제 묻는다. “당신이 그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당신은 이미 유용한 물건들로 가득 찬 트롤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유용하며, 무엇을 위해 그곳에 놓여 있는 것인가? 그것들을 말이 되도록 만드는 건 당신이다.”5) 



ㅡㅡㅡㅡㅡ



- 김윤비 (1998-)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석사 재학.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 활동했다(2022.07-2023.07). 동아시아 현대미술과 동시대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다.



1)  T.J Clark, “On the Social History of Art,” Image of the People: Gustave Courbet and the Revolution 1848,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3), 18.

2) 테리 이글턴, 『문화란 무엇인가』, 이강선 역 (문예출판사, 2021), 52.

앞의 책. 38; 예술의 역할에 대한 스미스의 고찰은 다음 문헌을 참고. 테리 스미스,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인가』, 이경운 역 (마로니에북스, 2013).

4) Daniel Muzyczuk, “DIY,”(2023), https://www.anastasiasosunova.com (2024년 11월 14일 검색); 
   작가와 작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다음을 참고. 작가 홈페이지, https://www.anastasiasosunova.com/ (2024년 11월 17일 검색);   
   작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anastasia.sosunova (2024년 11월 17일 검색). 

5) 앞의 글. 






아나스타시아 소수노바, DIY, 2023, 비디오 설치, HD 비디오 1513. 도판 제공 아나스타시아 소수노바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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