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노엘 W.앤더슨 : 흔들리는 이미지, 다시 쓰는 기억
현채이
가끔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줄 때가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종종 익숙하게 보았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끔 만든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의 본전시 《판소리: 모두의 울림 PANSORI: A Soundscape of the 21st Century》의 첫 번째 섹션 ‘부딪침 소리 Feedback Effect’에서 노엘 W.앤더슨(Noel W.Anderson, 1981-) 작업과의 만남이 그러한 경험을 선사한다.
우리는 첫 번째 섹션 ‘부딪침 소리 Feedback Effect’의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이 이어지는 통로에서 앤더슨의 <원숭이가 나무를 더 높이 올라갈수록, 엉덩이는 더 많이 드러난다. The higher the monkey climbs the tree, the more it shows his ass>(2023)를 마주친다. 이 통로는 주 전시장이 아니기에 작품을 기대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처럼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공간이 앤더슨의 작품으로 인해 감각을 낯설게 흔드는 장소로 돌변하게 된다. 통로에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마치 태피스트리를 기어오르는 듯한 모양새로 자리하고 있는 박제된 원숭이의 엉덩이와 그 밑에 자리한 문이 열린 작은 장난감 자동차이다.(도 1)
원숭이 뒤로는 벽에 걸린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눈에 들어온다. 태피스트리는 사진 이미지 그리고 그 위를 덮은 페인트칠이 만들어내는 레이어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을 이루는 첫 번째 레이어는 1965년 와츠 폭동(Watts riots) 당시 경찰이 흑인을 억압하는 현장을 포착한 사진이다. 와츠 폭동은 1965년 8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음주 운전을 단속하는 경찰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해 현장의 군중들과 경찰이 대치하며 시작된 폭동이었다. 이 폭동으로 희생된 34명의 사망자 중 대부분이 흑인이었으며, 그 중 23건의 사망이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이나 주 방위군(National Guard troops)의 행위로 인한 것이었다.1)
사진의 이미지는 원본을 왜곡하여 웨이브 효과를 주는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마치 거센 물결이 요동치는 듯 보인다. 이는 관람자로 하여금 마치 숨겨진 비밀이 갑작스레 폭로되는 듯한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사진은 인종적 억압과 사회적 위계 구조가 존재하지만 이미지가 편집된 방식과 그것을 덮고 있는 페인트칠 때문에 본래의 서사를 읽기란 불가능하다. 태피스트리 위로 더해진 여러 겹의 페인트 중 노란색 칠은 마치 표면을 서서히 잠식하는 이끼처럼 느껴진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선주황색 페인트는 조금은 폭력적으로, 그러나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색조 덕분에 과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듯하다. 가장 위에 얇게 얹힌 초록색 칠의 형상은 태피스트리의 한가운데 살포시 하지만 점령적인 태도로 자리 잡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겹겹이 더해진 페인트칠은 실제의 사건 위에 새로운 서사를 더하는 것만 같다.
미국 루이지애나 출생으로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노엘 W.앤더슨은 흑인 억압 이미지와 역사적 서사의 재구성을 탐구하며 이를 디지털 자카드 태피스트리와 설치 작업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한다. 앤더슨의 작업 방식은 이러하다. 우선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차용한다. 후에 차용한 이미지들을 수작업이나 디지털로 왜곡하고, 그것을 태피스트리에 옮긴 후, 태피스트리의 실을 하나하나 뽑아가거나 그 위에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그 작품에 레이어를 더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해당 인터뷰에서 앤더슨은 본인의 작업에서 태피스트리를 ‘몸’이라고 정의한다는 것이다. 앤더슨은 작업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가능성과 씨름을 한다고 말하며, 작품을 ‘몸’처럼 대하면 감성과 촉감이 더해지고, 소재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고 말한다.2)
작품을 앞서 말했던 ‘몸’으로 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앤더슨의 완성된 작품을 하나의 주체로 바라볼 수 있다. ‘몸’을 구성하는 레이어 중 가장 처음 자리 잡은 사진 이미지는 최초의 자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앤더슨은 본인의 자아를 바라보는 또 다른 자아로서 타자의 역할을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의 거울 단계 이론과 관련이 있다. 라캉에 따르면 유아가 최초로 거울을 보는 순간 몸과 자신의 이미지와의 분열을 경험하며 자아가 형성된다. 거울은 실제의 거울이기도 하고 거울의 역할을 하는 어머니 혹은 다른 타자이기도 하다. 유아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울 속 완벽한 통제를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자신과의 불일치를 경험하면서 욕망과 규범의 구조 속에서 자아를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자아는 언어와 규범 속에서 주체로 발전하고 욕망과 결핍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따라서 작품의 첫 번째의 레이어를 이루는 사진은 최초의 자아를 상징하며, 이후 레이어들은 각기 다른 층위에서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고 이 결핍이 자신과 타자로 인해 덧씌워지거나 확장되며 새로운 욕망을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태피스트리 위에 자리한 원숭이는 마치 작품의 다층적 서사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보이는데, 태피스트리 외부에 위치함으로써 관람자가 작품 외부에 있는 타자임을 환기시킨다. 원숭이를 통해 작품에 진입하게 되는 관람자는 자신의 위치를 작품의 외부에서 내부로, 다시 외부로 재구성하게 된다.
짧은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두 개의 태피스트리 조각물 <빛이 보이나요 Can you see the light?>(2022-2023),<코-ㄹ르ㅅ-ㅓ스 Co-loss-us> (2022-2023)기 보인다. (도 2) 이 두 작품의 첫인상은 무겁다. 짙은 푸른색과 어두운 흑색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무게감을 부여하며 공간을 압도한다. 겹겹이 드리워져 바닥에 닿을 듯 천장에 매달린 작품들은 자신의 몸체를 부분적으로 가리고 있는데, 이는 마치 중력과 균형을 이루려는 유연한 곡선의 움직임 속에서 포착된 한 순간을 연상시킨다.
<빛이 보이나요 Can you see the light?>(2022-2023)는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 The Blues Brothers」(1980)에서 차용한 이미지로 목사 역으로 등장한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 설교를 통해 두 주인공을 계몽시키는 장면이다. 또 다른 작품 <코-ㄹ르ㅅ-ㅓ스 Co-loss-us>(2022-2023)는 도곤족의 조각상 이미지를 참조한 것이다. 도곤족은 14세기 말리 남부와 인근 부르키나파소에 거주하는 전통 신앙을 지닌 종족으로 가면과 조각상을 통해 종교의식을 이어가며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사유체계를 발전시켜 왔다.3)
그러나 작품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중층의 겹 때문에 관람자는 이미지를 단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형태는 자연스레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을 다양한 각도로 돌아보게 만들어 이미지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이 순간 조각은 수동적인 응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관람자가 작품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 태피스트리는 바람에 살짝씩 흔들리며 미세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이 움직임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넘어 작품에 다시금 주체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이때 관람자는 자신이 작품을 응시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그것에 의해 응시 받는 객체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응시는 단순히 바라보는 시선과는 다르다. 라캉은 빛의 점에서 응시가 먼저 존재한다고 말한 것을 강조하며, 응시는 주체가 자신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장치로 작용한다고 말한다.4) 이때 응시는 단순히 타자의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의 장치이다. 마찬가지로 작품은 관람자의 응시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다시금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응시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관람자가 작품을 응시할 때 작품 또한 관람자를 응시한다. 이 순간 관람자는 단순히 작품을 바라보는 주체에서 벗어나 작품의 응시 속에서 자신에 대한 그리고 자신과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이처럼 앤더슨의 작업은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거울 단계에서 시작된 자아와 타자의 분열을 탐구하면서 관람자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로써 앤더슨의 작업은 예술적 실험 주체와 타자, 응시와 시선의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탐구하며 이를 통해 관람자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는 성찰의 공간을 제시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들, 사진, 순간, 기억 등은 때로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앤더슨은 고정된 주체란 존재하지 않음을, 주체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임을 끊임없이 말한다. 그의 작업은 관람자로 하여금 마치 토끼 굴로 떨어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처럼, 자신 안에 숨겨진 다양한 모습들을 발견하는 여정을 떠나도록 초대한다. 앨리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순간, 채셔 고양이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렸지. 도착할 때까지 걸어만 간다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 거야.”5) 앤더슨의 작품은 고양이의 말처럼, 과정 그 자체에 주목한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재구성하고, 변화라는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재발견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탐구의 장을 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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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채이(1996-)
칼 아츠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미술과 졸업 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과정을 재학 중이다. 미국 동시대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다.
1)Morgan Jerkins, “She Played a Key Role in the Police Response to the Watts Riots. The Memory Still Haunts Her—But Black History Is Full of Haunting Memories,” Time Magazine, 3 August 2020, https://time.com/5873228/watts-riots-memory/ (2024년 11월 24일 검색)
2) Robert R.Shane, “Noel W.Anderson with Robert R.Shane,” The Brooklyn Rail, June 2021,
https://brooklynrail.org/2021/06/art/Noel-W-Anderson-with-Robert-R-Shane/ (2024년 11월 24일 검색)
작가와 작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다음을 참고. 작가 홈페이지, https://nwastudios.com/ (2024년 11월 24일 검색) ;
3) 장훈태,「말리공화국 도곤족 조각상의 의미와 상징에 관한 세계관적 접근」,『한국아프리카학회지』59 (2020): 177-205.
4) 자크 라캉, 『자크 라캉 세미나 11』, 맹정현 역(새물결,2008),114
5)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김동근 역(소와다리,2015),86
W.앤더슨, <원숭이가 나무를 더 높이 올라갈수록, 엉덩이는 더 많이 드러난다
The higher the monkey climbs the tree, the more he shows his ass>, 2022-2023,
훼손되고 해지고 늘려진 면 태피스트리에 염료, 발염제, 장난감 자동차 및 박제 원숭이, 365x274cm.
<빛이 보이나요? Can you see the light?>, 2022-2023, 훼손되고 해지고 늘려진 면 태피스트리에 염료,
579x518cm(좌) <ㅋ-ㄹ로ㅅ-ㅓ스 Co-loss-us>,2022-2023, 늘려지고 해진 면 태피스트리에 발염제, 670x670cm(우)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