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맥스 후퍼 슈나이더 : 비非인간들의 사신使臣을 자처하기
송가희
맥스 후퍼 슈나이더(Max Hooper Schneider, 1982-)는 뉴욕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출생으로 철학과 스피노자(Baruch Spinoza, 1932-1675)를 전공한 어머니와 수의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1) 이후 그는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에서 생물학 및 도시 디자인 학사, 하버드(Harvard University)에서 조경 건축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University of Hawaiʻi at Mānoa)에서는 해양 생물학 및 곤충학을 추가로 전공했다. 이러한 그의 궤적은 그가 생물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확장했는지 잘 보여준다.
슈나이더는 일상 속 사물, 동식물, 자연 등을 융합해 새로운 공간과 환경을 만든다. 이를 통해 인간 중심적 서사, 풍경, 환경을 탈피한다. 실제로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고철, 구리, 고무파이프, 달팽이, 수박, 옥수수, 치즈볼 과자, 모래 등 매우 다양하다. 작가는 이와 같이 인간 이외의 무기물과 유기물, 즉, 비非인간을 아우르며 이들의 공간이자 서식지를 상상한다. 작가는 이를 ‘변환-서식지(Trans-habitat)’라 칭한다.2)
‘변환-서식지’는 슈나이더의 작업에서 점차적, 그리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생성된다. 그는 2010년대 초반에는 한두 개의 인공물 혹은 자연물의 기능이나 상태를 변화시킴으로써 탈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 일례로 로스앤젤레스 제니(Jenny's)에서의 《The Pound》(2014.11.07-12.21)에 전시된 작품들이 있다. <Genus Watermelancholia>(2014)는 UV 용액이 담겨있는 유리 상자 속 수박이 곧 작품이다. 유리관 상단 바깥쪽에는 디지털 표지판이 붙어있는데, 이 표지판은 구리선으로 수박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마치 현대에 인간들이 농작물이나 육류의 신속한 공급을 위해 인위적으로 성장촉진제 등의 약물을 주입하는 광경처럼 보인다. 기기의 화면에 적혀있는 문구 ‘HELP!’는 수박, 혹은 더 나아가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경고로 읽힌다. 이외에도 슈나이더는 팝콘 기계 안에 물을 채우고 달팽이의 서식지를 만들거나, 고철 덩어리를 뭉친 더미를 전시장 구석에 둔덕처럼 조성했다. 이와 같이 작가는 비인간 세계의 물질들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한다. 이들의 죽음과 재탄생 속 순환고리를 드러내는 작가는 마치 이들을 대변하는 사신(使臣)이다. 작가는 이 생사의 과정 속 생성되는 창조, 배아, 분열, 소멸 등을 분석하는 동시에 관망한다. 그리고 이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슈나이더는 차츰 작품에 푸른 조명, 샛초록의 인공식물, 폐기물, 작은 장난감, 전기 도금된 식물 등 다소 조악해 보이는 세부 요소들을 추가했다. 작가는 <The Plaguewielder>(2015)에서 돈을 넣고 행운의 카드를 뽑는 ‘행운을 말해주는 기계(Fortune Telling Machines)’의 기능을 제거했다. 그리고 이를 하나의 서식지로 만들었다. 기계 내부는 인공식물, 전구, 행운 카드, 낚싯바늘, 곰팡이, 건조된 밀웜 등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풍경이 된다. 푸르스름한 조명은 이 풍경에 연극적, 인위적, 재앙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푸른 풍경은 마치 어느 비극의 주인공이 나지막하게 독백하는 듯한 장면을 연상시키며 비인간들의 서사를 비춘다. 최근 전시 《Twilight at the Earth’s Crust》(2023.10.27-12.18)에서는 고추, 체리를 비롯한 식물들을 도금하거나, 미니어처들로 작은 집을 만들고, 과자로 동굴을 만든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재료를 분리해 재조립하는 방을 ‘도살장(abattoir)’이라 칭한다. 이는 원래의 기능을 하던 사물이나 물질이 작가의 손에서 수명을 다하고 수동적으로 그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이해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곧 새로운 맥락과 함께하는 탄생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번 비엔날레 본전시 <겹침소리> 섹션에 위치한 슈나이더의 작품 <용해의 들판 LYSIS FIELD>(2024)(도판1)에서는 그의 도살장을 거친 물질들의 거주지가 펼쳐진다. 시멘트 바닥을 밟던 관람객들은 모래를 밟으며 점차 그 환경 속으로 들어간다. 곳곳에는 모래 분화구와 구리로 전기 도금된 식물들이 보인다. 분화구에는 작은 쇠구슬이 동그란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그에 따라 모래는 궤적을 끊임없이 남긴다. 말라 비틀어가는 듯한 도금된 식물들은 위협적이다.(도판 2) 어느새 검은색 액체가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못에 다다르면, 갖가지 식물들로 뒤덮인 이층 침대, 조명, 일상 사물들이 한곳에 모여있다. 거꾸로 솟는 검은 액체와 그악하고 무성한 식물들, 푸르스름하다 못해 시퍼런 조명은 이곳을 마치 괴물 혹은 악당들의 유토피아처럼 조성한다. 이처럼 슈나이더는 인간이 만들어 낸 물질 및 폐기물, 훼손한 자연들을 한 데 엮어 기묘한 거주지를 건설한다. 이를 통해 반성과 경각심을 갖고 인간을 돌아보는 한편, 호기심을 바탕으로 인간 외의 것들에 귀를 기울인다. 이는 인간 외의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작품에 묻어난 것으로도 설명된다.
슈나이더는 어렸을 때부터 썼던 물건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현재에도 고등학교 때부터 입었던 티셔츠를 입고, 10살 때부터 썼던 침대를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3) 이러한 그의 물질과 사물에 대한 애착은 전시 《Damaged by Miracles》 (2021.10.21-12.18)에서도 나타난다. 이 전시는 기존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의 변환 과정을 ‘기억’이라는 감정적 서사와 연결해 풀어냈다. <Eocene Epizoon:Crystal Bacteriophage>(2021)는 모래 더미 속에서 고철 기계가 마치 알루미늄 식물로 재탄생하는 것처럼 표현한 작품이다. 유기물로 작동하는 듯한 무기물은 물질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동한다. 덮여있는 모래 속에서 피어난 은빛 식물은 시간에 따라 쌓인 기억 속 물질에 관한 애정이자 지속성에 대한 찬사이다.
이처럼 슈나이더는 자연, 동물, 사물들을 융합해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며 인간과 비인간, 삶과 죽음, 유기물과 무기물, 자연과 인공 등의 많은 것들의 경계를 아우른다. 소멸과 생성이라는 자연적 원리를 파괴와 창조라는 인간의 영역으로 풀어냄으로써 인간 중심을 비판하는 동시에 인간 외의 것들을 소생시킨다. 실제로 필자가 계속 본 고에서 얘기하는 인간 밖의 영역에 있는 많은 것들, 가령 사물, 가구, 과자 등은 이미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들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이 혼합된 경계 더미 위를 딛고 살아가고 있다. 작가는 이 더미를 마음대로 주물러 만들어 낸 인간들의 마천루에서 내려와 야트막한 더미를 재건축한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더미들을 창조하며 언젠가 무너져버리거나 뒤집힐지도 모르는 마천루에 대해 경고한다. 이는 인간 중심적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비인간들의 지령, 혹은 바람을 경청하고 이를 전달하는 사신의 역할을 자처하는 과정으로도 해석된다. 기꺼이 이들의 사신이 되어 인간 세상에 끊임없이 하소연하기. 슈나이더는 이 넋두리를 수집, 관찰, 분석, 분해, 용해해 상상의 서식지 및 거주지를 조립, 조성, 건축하는 방법으로 세상에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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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가희(1994-) ruby6744@naver.com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현재 삼성문화재단 출판 프로젝트 참여.
1 )미국 출생. 작가의 인스타그램 ID는 다음과 같다. @max_hooper_schneider
2) 《Max Hooper Schneider: Carnival of Gestation》(2024.7.14 - 2024.10.13) 전시 홈페이지 소개글 참고.
https://ucca.org.cn/en/exhibition/max-hooper-schneider/
맥스 후퍼 슈나이더, <용해의 들판 LYSIS FIELD>, 2024,
키네틱 모래 분화구, 담수 생태계와 인공 쓰레기 폭포, 구리로 전기도금된 식물, 재배되는 결정체,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오브제와 지역 폐기물, 분해된 화강암 덮개, 가변 크기.
맥스 후퍼 슈나이더, <용해의 들판 LYSIS FIELD>, 2024,
키네틱 모래 분화구, 담수 생태계와 인공 쓰레기 폭포, 구리로 전기도금된 식물, 재배되는 결정체,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오브제와 지역 폐기물, 분해된 화강암 덮개, 가변 크기. 작품 전시전경 중 일부분.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