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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당 안동숙-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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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이동훈 미술상 수상작가 초대전 : 오당 안동숙
-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세계 -
2013. 9. 3 - 11. 24 / 대전시립미술관 5전시실

❍ 대전시립미술관(관장 이종협)은 제10회 이동훈 미술상 수상작가인 오당 안동숙 화백 초대전을 오는 9월 3일부터 11월 24일까지 개최한다.
❍ 이동훈 미술상은 작가이며 교육자로서 대전·충청지역 미술계를 개척하고, 한국근·현대미술계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고(故)이동훈 화백의 예술정신을 기리고 자 2003년도에 제정되어 올해로 11회째를 맞이하는 미술상이다.
❍ 이번 전시는 전년도 10회 수상자인 오당 안동숙화백의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장르별로 대표작품 40여점을 선보인다. 반세기가 넘는 작가의 흔적들이 묻어있는 안동숙화백의 구상에서 비구상까지 주옥같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 전시개요
  ❍ 전시명 : 제10회 이동훈미술상 수상작가 초대전 : 오당 안동숙
  ❍ 전시내용 : 60~80년대 작품 35점(문인화, 화조화, 산수화, 드로잉, 추상화)
               도자기 6점, 수석 9점 외 자료

□ 작가소개·작품의 특징
  ·1922 전남 함평生(92세). 이당 김은호 선생 사사
  ·195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수학
  ·1965-1987 이화여대교수 및 학장, 산업미술대학원장 (1987년 정년퇴임)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 
    (상훈) 보관문화훈장, 국전문교부장관상 및 국전추천작가상 수상,
          의제 허백련미술상, 기독교미술상, 대한민국 미술인상 대상수상

  ❍ 오당 안동숙은 일제 강점기때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전통적인 동양화를 익히며 새 그림, 닭그림, 꽃그림, 소그림, 풍경화, 인물화, 비구상등 전통적인 동양화의 재료와 방법을 과감히 탈피하여 소재에 구애됨이 없이 창작세계를 펼쳐 나간다. 60년대에는 동양화의 전통적인 먹과 종이라는 재료에서 벗어나 서양화에서 쓰이는 유채성 안료 등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동양화의 실험적 요소를 보여주었는데 당시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관념적인 틀을 타파하고 한국화의 방향성을 제시한 작가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70,80년대 대표작품 <은총恩寵> 시리즈는 아크릴 재료를 활용해 수묵이나 채색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최대한 표현한 작품으로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재료의 한계란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을 펴 나간다. 즉 색채나 수묵은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수단이지 재료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며 실험을 통한 재료의 해방과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작가들이라면 그들은 더 이상 동양화나 서양화 를 그리는 것이 아닌 단지 회화를 그리고 있는 것일 뿐이며, 또 거기에 구현돼고 있는 조형성이 있다면 재료의 재질이나 결정된 형식 등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 “간결하고 직관적인 운필로 추상미학을 이끌었다”, “동양화의 구태의연한 엄숙주의와 전근대적 취향을 넘어선 추상표현주의적 한국화의 거장”등의 평가를 받는 오당 안동숙의 조형적 실험정신에 입각한 작품을 감상하며 이 시대 진정한 예술의 아름다움을 시민들에게 보여주어 문화적 삶의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세계 
공광식 |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간결하고 직관적인 운필로 한국의 추상미학을 이끌었다’또는‘동양화의 구태의연한 엄숙주의와 전근대적 취향을 넘어선 추상표현주의적 한국화의 거장이다’는 등등  오당吾堂 안동숙安東淑화백을 향한 평가들을 통해서 우리는 역동적으로 변모하던 근대 한국화단의 향방을 가늠하고 추진하는 길에 얼마만큼 오당의 공로가 컸던 가를 가히 짐작하게 된다.   

  사실 수동적으로 형성된 근대시기의 한국 화단이었던 만큼 독자성을 띠고 자생적 성장을 갈망하던 한국 화단은 많은 갈등과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았다. 해방 후 미술계에 요청되는 시대적 과제는 물론 나날이 변화하는 새로운 감성과 감각으로 하여금 새로운 동양화를 그리고 다양한 실험과 모색들을 절실히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오당은 일본화풍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작업으로 재건해야할 동양화의 과제로 그 생명성 없는 형식적 기술주의, 즉 전통의 권위와 허울만 남은 동양화의 경화硬化 상태를 지적한다. 곧이어 그러한 경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조형의식을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이른다. 특유의 치열하고 파격적인 실험정신으로 일관된 오당의 조형적 태도는 죽어가던 조형적 생명성을 구원하며, 새로운 한국화의 향방을 제시함은 물론 오당 스스로 특유하고 품격 있는 화력을 갖춰나갈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그러한 동력 하에 자신의 철학을 관철시키며 새로운 동양화로 거듭나고, 자생적 한국화의 본래적 모습을 찾아갈 수 있을 하나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는 점은 당시 신선하고 혁신적인 그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실상 오당이 미술인으로서 또 미술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한다. 1922년 전라남도 함평 나산에서 부농의 둘째아들로 출생, 가계의 쇠운으로 13세 때 할머니와 함께 서울로 상경, 남대문에서 사과를 떼다 창경궁 근처에서의 행상을 하던 시절 그의 단골손님은 당대 최고의 화가 이당선생이었다. 운명처럼 만남이 이뤄지고 이당은 오당에게 또 그림그리기를 권했던 것인데,  이후 이당의 도제교육장(개인화실)인 낙청헌洛靑軒에 입소하게 된(14세) 오당은 (운보)김기창, (월전)장우성, (현초)이유태, (심원)조중현, (유천)김화경 등 이당문하의 연배작가들과 교류하며 <후소회後素會>, <이묵회以墨會>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당문하에 들어간 지 4년 뒤 1940년(18세)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군계群鷄>출품으로 첫 입선을 시작으로 화단에 등단한 뒤 세 차례 연이은 입선(42년 제21회, 43년 제22회, 44년 제23회)을 약관의 나이에 받는 등 대단한 성과를 이뤘지만 한동안 다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하여 국전)를 통해 중앙무대에서 진출하기까지 상당기간이 걸린다. 한편 일제강점기 소개疏開 정책상 이당 선생과 오당은 안성에 거주한 적이 있으며, 먼저 서울로 상경하게 된 오당은 해방과 함께 성균관대학 예과에 입학, 1948년 다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장우성,노수현의 지도를 받음)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졸업도하기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56년까지 비교적 긴 전주에서의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 다른 미술인보다 뒤늦게 국전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분분하나 결국 61년 제10회 국전에서<귀로>作 출품으로 특선수상을 하고, 제11회 국전에서 <대망>作으로 문교부 장관상을, 12회 국전에서 <양지陽地>作으로 특선을 받으며 이후 국전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을 역임하며 그의 이름은 비로소 확고하게 중앙화단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한편 오당의 작업세계에서 나타나는 주제들은 주로 자연세계이다. 돌이나 자연 그리고 추상형태 등이 대부분이며, 수묵에서부터 문인화, 드로잉, 추상회화 등 전 영역에 걸쳐 자신의 실험적 작업을 전반적으로 수행한다. 그의 작업과정을 보면 이당의 문하답게 상당히 전통기법에 기반을 두고 제작하던 초기과정이 있지만(40~50년대) 오당의 전 작업과정에서 두루 보이고 있는 문인화작업의 경우 그 먹의 깊이와 대담한 구도의 파격성은 가히 남화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하나 그만의 특유의 격이 실험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로 들어서면 추상미술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실험은 그의 작업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서양의 추상미술이지만 오당은 정신성을 추구하는 동양화가들이야말로 오히려 추구해야 할 세계관으로 추상미술을 주장하며 스스로 실험적인 경향에 몰입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60년대 초 새롭게 나타난 묵림회墨林會와도 뜻을 같이 하며 오당의 활동은 더욱 활력을 뛴다. <후정의 춘의 厚情의 春意> 등 작품을 보면 단숨에 붓이 먹을 머금고 농담이 함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당의 실험정신은 70~80년대에 이르러 <은총恩寵>시리즈로 귀결되는데, 비구상 작업과정에서 조형성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켜 나타나게 되는데 우주만물의 질서와 생명력에 대한 원리도 이제는 선, 형, 색 등의 응집과 통합을 통한 조형적 질서만으로 가능함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후반의 <군무>에서 보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발묵과 선묘만으로도 무희들의 동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으며, <월광의 무>에서는 소박하고 순진한 처녀들이 모여 강강술래 하듯 원을 그리며 서로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의 연상은 아름답다. <선인독경仙人讀經>은 호랑이가 여우를 노려보고 있는데 여우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신선이 턱을 괴이고 익살맞게 보고 있는 광경이 무척 해학적이다. 한편 <은총恩寵>작업에서 아크릴 재료를 활용함으로써 재료적 한계란 없다는 그의 지론을 확인해 보이기도 하고 있다. 즉 색채나 수묵은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수단이지 재료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오당이 행한 일련 작업과정을 보면, 가장 전통적 기법에 기반하고 있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조형의지를 통한 수많은 실험적 자세와 작업들에 있어 그의 작업과정을 바라보던 세간의 평은‘이당의 이단異端 이었다. 일면 사실이며 타당한 평가인 듯하나 실상 그가 걸어가고자 했던 길은 이당의 문하에서, 또는 동양화가나 서양화가로서의 길도 아니었다. 단지 오당은 자신이 현재 서 있는 현대에서 바라보아야 할 회화에 대한 인식과 조형에 대한 구원의 길을 가고자 했을 뿐이었다. 남과 다른 양식의 차이나 변화가 아닌 조형자체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먼저 떠올리며 변화하고 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당이 왜 이당이며, 오당이 왜 오당인가. 모든 작가가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로서의 생존은 스스로의 결단과 포기할 수 있는 과감한 용기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길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 물음을 통한 답을 구하며 자신의 실천적 변화를 지혜로써 꾀하고 있었던 오당은 자신의 작업 속에 그려지고 있는 <오당새>와 같다. 그래서 언제나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덕목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는 서슴없이 철학 없이 예술은 없다는 일깨움의 교육으로 일관해 왔다. 아무리 화사한 그림이라도 철학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며, 단지 재료나 소재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먹으로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단호히 말하는 오당은 이제 이당의 그늘에서 성큼 벗어나 스스로의 확신과 검증으로 구축된 자신의 세계를 확보한다. 오당의 작업과정과 예술세계에서는 더 이상 재료에 대한 얽매임도 없으며 표현 역시 자유롭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초기 수묵중심의 작업시기에도 그랬고 채색 혹은 아크릴이나 도화, 어떠한 재료를 사용했던 작업의 과정에서 조차 그는 늘 자유로웠다. 참다운 조형성을 추구하는 오당의 화면에는 동서양의 틀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경계가 지워지는, 무화武火되는 지점에서 오당의 작업은 일어난다. 경계가 없으니 제한도 없다. 제한이 없으니 자유롭다. 오당의 끊임없는 조형적 의지가 작동하는 본연의 중심이자 그가 추구하는 궁극적 지점은 바로 필가묵무筆歌墨舞의 세계이다. 철저히 도가적 자연사상에 기저基底하고 있는 그의 조형세계는 바로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자유자재한 그야말로 걸림 없음 그 자체의 경지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표출되는 자연스러움, 마치 자연과도 같은 경계에 다름 아닌 경지이다.  

  자신의 그림을 돈에 의해 내어준 적은 없어도 수석을 가지고 온 이한테는 그림을 내 주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평생의 지기였던 수석의 모습은 전체 작품 속에서 자주 보이는데, 수석의 형태나 표면에서 보이는 결들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미지로만 볼 수 없다. 오랜 세월 돌이 겪어온 비와 바람과 겪어온 시간의 응축이다. 산수경석의 약자인 수석은 말 그대로 저절로 형성된 대자연의 섭리이다. 자연이 만들어 낸 수석처럼 그 역시 기법적인 면에서나 형식면에서 자유롭게 개별적인 소재들을 화면에 구성한다. 이후 오당의 작업에서는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종교적 추상회화(70,80년대) 속에 더욱 심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대자연은 이제 무한한 존재이며 창조주로서 그의 품안에서는 성과 속의 분리가 불필요하듯이 더욱 자유로워진 오당의 선線과 형形으로 꾸려진 대상들에는 존재 자체와 생명감 외에 그 어떤 것도 피력하지 않는다. 형식미를 넘어선 내용미가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유와 무의 경계를 넘어서며 자연을 통한 인간과 예술의 새롭고 완전한 전일적 만남을 <오당새>는 오늘도 지켜보고 있다. 

오당이 주창하는 새로운 화경畵境은 이제 동·서양이란 대립적 시각이나 이념, 혹은 단단한 양식적 틀을 넘어서 도달될 수 있으며, 보다 넓고 자유로운 표현양식으로 가능한 심화된 동양화의 세계이다. 동양화를 넘어선 참다운 동양화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오당 안동숙화백의 작품은 이화여대박물관에 30점의 작품(1988년), 2011년도에는 그의 고향인 함평군립미술관에 120점, 2012년도에는 평생 모은 수목, 수석, 자료 425점을 남을 위해 베푸는 후덕한 마음으로 기증되었다. 특히 수목과 수석은 오당이 그림의 소재로 사용하거나 영감을 얻는 것들로 오당의 미술 혼과 손때가 고스란히 담긴 것들이다. 

오당화백이 평생 추구했던 동양화단의 기존질서에 대한 변화, 동양화의 현대적 계승, 그가 추구하고 실천하며 제시했던 새로운 한국화의 방향성과 추상회화의 성과를 이어받아 더욱 성장시키고 발전시켜야하는 것은 이제 우리 후학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동양화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회화는 표현적 농도가 화면에 현실로 남아야 한다.”는 선생의 지론을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새겨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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