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22-05-04 ~ 2022-05-28
02-732-7241
누크갤러리는 2022년 5월 4일부터 2022년 5월 28일까지 국동완개인전 <방향연습 SENSE OF DIRECTION>을 개최한다.
드로잉, 페인팅, 조각, 책 작업을 통해 무의식과 무의식에 접근하는 과정을 작업으로 전개해가고 있는 국동완은 최근 치솟은 집값을 보며 한동안 막막한 상태로 일상을 살고있는 자신의 불안한 상황을 집값 그래프의 상향, 하향 곡선의 빨강과 파랑 물결에 대입해 풀어본다. 이번 전시에는 의문과 고통의 표면을 이미지로 만들어 질문하고 손이 그에 자동으로 반응하여 그려내는 드로잉과 새롭게 선보이는 오일 파스텔 드로잉 2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전시 안내*
전시 제목: 방향 연습 SENSE OF DIRECTION
전시기간: 2022 년 5월 4일 – 5월 28일
참여작가: 국동완
전시 장소: 누크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평창 34 길 8-3
관람시간: 화~토: 11:00am~6:00pm 공휴일: 1:00pm~6:00pm *일, 월: 휴관
전시 문의: 02-732-7241 nookgallery1@gmail.com
전시 취지
생존을 위한 몸짓 연습
이슬비‧미술평론가
국동완은 꿈의 기록에서 출발해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자신의 내면과 외부의 세상이 뒤얽힌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반복해서 바라본다. 그의 작업은 자신을 사로잡은 의문에 온몸으로 반응하는 과정이자 그것을 응시하는 태도이다. 특히 드로잉은 뚜렷한 무엇을 재현하기보다 내면의 풍경을 끄집어내고 그리는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감각과 관심을 포괄하는 여정이다. 그 자신도 손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 전에는 무엇이 그려질지 예측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드로잉은 길과 유사하다. 자유 연상에 기반을 둔 그의 드로잉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걸어온 궤적을 지팡이 삼아 더듬어가는 것과 같다. 정해진 길 없이 어느 방향이든지 길이 될 수 있다. 그는 항상 가까운 길을 두고도 정처 없이 방황하며 가장 멀리 우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가 ‘이미지 질문지’라고 이름 붙인 밑그림만이 등대처럼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문득문득 상기시켜줄 뿐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미지를 다 그려낸 이후에도 의문이 해소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이미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는 드로잉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발견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론을 고안해낸다. 완성된 이미지를 칼로 쪼개고 재조합하거나, 이미지를 증폭시켜 기존 드로잉의 비어있는 틈새를 종이테이프로 채우고 남은 부분을 붓질로 색을 입힌다. 때로는 이미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가지 않은 길을 걷거나, 길과 길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가 집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꺼내기 시작한 것은 <데칼코마니 라이프>(2014)였다. 성장기를 보낸 부모님 집과 옆집의 아파트 평면도를 바탕 삼아 자신의 기억을 건져 올리고 가족과 이웃의 관계에서 떠오르는 모든 감각을 끌어안았다. 한국 사회에서 집, 특히 아파트가 돈으로 치환된 욕망과 소비의 상징으로 안착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당시 그가 바라본 집은 인간의 내밀함이 응축되고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가 발생하는 장소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집에 대한 그의 인식도 혼란스러워졌다. 1인 가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집값은 더없이 치솟았다. 그도 아이의 취학을 앞두고 집을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집을 규정하는 현실적인 세법과 집의 본래적 가치 사이에서 분열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자본의 논리가 삶의 태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이번 신작에서 국동완은 주식 차트처럼 상행선은 빨강, 하행선은 파랑으로 그려야 한다는 드로잉 원칙을 세웠다. 처음에는 낯선 제약에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손도 무력하게 반응했다. 그동안의 촘촘한 드로잉과 달리 <방향 연습 #1, 2, 3, 4>에서 방향 전환에 집중하며 그은 몇 개의 선은 두드러지게 여백을 강조한다. <방향 연습 #5>에서 그의 손은 기존의 드로잉과 닮은 형태를 끌어낼 수 있었는데 바닥에 처박힌 종이비행기, 폭탄 등의 형상은 재난의 상황을 암시한다. 제한된 색상 외에 형식적으로는 이전의 드로잉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는 확연한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드로잉은 ‘나’를 벗어나 ‘나 아닌 것을 껴안으며 미지의 존재가 되는 과정인데 견고한 원칙이 작동하는 순간에는 어떠한 새로운 감각도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장>에서는 앞선 원칙을 고수하며 종이와 색연필 대신, 캔버스 화면에 오일 파스텔 드로잉이라는 또 다른 방식을 채택했다. 그리고 그동안 구체적으로 드러낸 적 없었던 이미지 질문지를 그대로 그리면서 빨강과 파랑을 출력하는 기계를 자처했다. 빔 프로젝터가 캔버스에 투영한 밑그림을 따라 긋는 행위는 그동안 자신의 내면을 비추고 감각을 일깨우는 성찰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작용했다. 이것은 마치 동굴에 갇힌 죄수들이 눈앞에 비친 그림자를 보면서 그것이 실체인 양 착각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 종속돼 그저 자본의 명령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완성된 <불장>을 보면 한국의 전형적인 집의 형태인 연립 주택 구역과 아파트 단지로 양분된 광경이 펼쳐진다. 여기에 더해지는 독특한 감각은 빨강과 파랑의 선이 지워지면서 불이 타오르거나 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리듬감이다. 드로잉의 진행 과정을 짚어보면 그는 선을 긋고 바로 지운 것이 아니라 빨강과 파랑으로 밑그림을 다 그린 다음에 선을 뭉개는 단계로 나아갔다.
처음에 드로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손과 몸짓은 더없이 강박적인 상태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에 숨이 막히고, 캔버스에 닿자마자 미끄러지는 오일 파스텔을 따라가느라 숨이 차기도 했다. 일방적으로 통제된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자유 연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기존의 드로잉이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어가는 과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자동차가 달리는 고속도로, 즉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일방통행로를 맨몸으로 달리는 경험이었다. 자유 연상은 모든 선을 그린 이후에 그것을 없애는 단계에서 발생했다. 그는 기계적인 드로잉에서는 어떤 울림도 느끼지 못했지만 선을 지우는 과정에서 물길, 불길을 따라 어떤 거스름도 없이 뻗어 나가면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오일 파스텔을 재료로 선택한 순간 기계적인 드로잉의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우둘투둘한 캔버스 표면 위에 오일 파스텔이 그리는 선은 종이 위에 색연필로 그린 것처럼 매끄럽게 나올 수 없었고, 두 가지 색이 반복되면서 때로는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 인간의 몸은 결코 기계일 수 없었다. 이번 작업에서 새로운 발견은 잘못 혹은 실수라는 개념이 그의 드로잉의 영역에 추가되면서 지우는 행위가 의미하는 전혀 다른 가능성이다. 그렇다고 작업에서 기존의 선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선과 선을 가로지르면서 서로 연결하고 자신만의 방향을 만들어 낸다.
흥미롭게도 이번에 선보인 작업들은 제작 시기, 제작 순서에 따라 뚜렷한 흐름을 보인다. 원래도 그의 드로잉은 왼쪽 상단 시작점에서 오른쪽 하단 끝점에 이르기까지 밀도, 채도 등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좀 더 극적이다. 그것은 드로잉의 몸짓이 연습을 거듭하면서 그를 처음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제작된 <방향 연습>에서는 낯선 제약에 반응하는 서투른 몸짓이 보다 유연해지는 경로가 명확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다음에 제작한 <불장>에서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빨강과 파랑이 만들어낸 더 큰 난관에 부딪치지만 결국 그는 신명나게 선을 지우면서 자신의 호흡을 회복한다.
모든 것을 빨강과 파랑의 관계로 바라보는 관점은 일상의 장면으로 뻗어 나가는데 이 이미지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불장>에 비해 굉장히 다채로운 방향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상을 담아낸 후반 작업에서는 두 가지 색으로 구성된 선이 여러 방향으로 요동치며 순환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거나 뒤엉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선을 지워내는 방식도 장면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빨강과 파랑의 변주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마지막에 그린 <지우면서 그리기>는 높은 습도로 불투명해진 유리에 꿈 일기를 손으로 쓴 흔적이다. 여기에서는 빨강과 파랑으로 그려야 한다는 드로잉 원칙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는 이번 작업에서 정반대의 몸짓으로 세상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자신만의 균형감각을 익혔다.
한국 사회에서 양극화 현상은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분단, 남녀 갈등, 세대 갈등 등 다방면에 걸쳐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중간 어느 지점을 찾으려는 고민도 균형을 맞추려는 경험도 부족하다. 최근 사회적으로 가장 뜨거운 이슈는 ‘지속 가능성’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 지속 가능한 소비, 지속 가능한 도시 등 이외에도 ‘지속 가능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다양한 개념들을 만날 수 있다. 지속가능성이란 기본적으로 자연이 다양성과 생산성을 유지하고, 생태계를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인 관계임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국동완의 드로잉은 근본적으로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고 앞으로의 삶을 모색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흔적이다. 폐쇄회로 같은 견고한 선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방향을 만드는 행위는 우리의 삶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더 넓은 세상이 있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남 보다 먼저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세상의 속도에 맞춰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고 옆 사람과 눈을 맞추고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만의 방향을 만드는 몸짓은 우리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작가 노트
한숨이 휘파람이 될 때
국동완
치솟은 집값을 보며 한동안 막막한 상태로 일상을 살았다. 나름 삶을 열심히 꾸려왔다고 생각했지만, 더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매일의 여기저기에 쌓였다. 내가 집 말고도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고 집값 그래프를 주시하던 눈은 주변의 모든 것을 빨강과 파랑의 물결 속에 대입하기 시작했다. 그래프 속, 방향 감각 제로의 날들이었다.
나의 작업은 살면서 마주하는 의문을 자유 연상으로 다루어 나와 사회의 접점의 조형을 발견하는 일이다. 의문과 고통의 표면을 이미지로 만들어 질문하고 손이 그에 자동으로 반응하여 그려내는 드로잉을 통해 내면의 대답을 들어왔다. 당연히 대답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작업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평온이 찾아왔다. 활활 타는 불덩이를 손에 쥐고 재가 될 때까지 지켜보는 시간. 전시는 손안에 그대로 남겨진 재를 흩날리는 일이었다. 작업이 한 번도 쉬웠던 적은 없지만 매우 노골적이었던 이번 질문에 답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붉으락푸르락 좌충우돌이었다.
종이에 색연필로 그린 <방향 연습> 시리즈의 이미지 질문지는 현재 사는 아파트의 평면도에 지난 30년간의 서울 집값 그래프를 더해 만들었다. 우상향하는 선은 빨강으로, 우하향하는 선은 파랑으로 그린다는 새로운 드로잉 원칙도 세웠다. 손이 그리는 대로 무한정 내버려 두던 이전의 방식에 아주 큰 제약을 둔 것인데, 손은 어떻게든 그려낼 것이라 믿었다. 우왕좌왕하는 삶 속에서 애써 일상을 일구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손을 설득하고 달랬다. 하지만 정말 어려웠다. 미세한 방향 전환을 신경 쓰다 보니 선 하나 마음껏 그을 수 없었다. 계속 흐름이 끊겼고 이전의 자유 연상에는 없던, 실수라는 개념도 생겼다. 매 순간 나는 무의식이 들어올 틈도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사는 일과 똑같았다.
대답이 잘 나오지 않으면 질문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Q&A 방식을 고안했다. 그동안 이미지 질문지는 드로잉 아래에서 질문하는 역할로만 사용하고 노출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이미지를 빨강과 파랑의 선들로 선명하게 그려서 질문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두 가지 색으로 구성된 일상을 마주한 손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답은 그리는 과정이 아닌, 지워내는 과정에서 자유 연상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번 전시에 새롭게 선보이는 오일 파스텔 드로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색이 뚜렷하고 그리는 손의 힘이나 방향이 솔직하게 보일 것. 번지고 지워지는 모습이 더 잘 보일 것. 민감하게 뭉개지는 오일 파스텔의 특성은 이 조건들을 충족시켰다. 캔버스 위에 파랑과 빨강의 선으로 드러난 일상의 모습들을 가만히 보다 보면 바람이 불거나 움직이는 곳이 보였다. 그러면 손은 얼른 그곳으로 가 떨면서도 과감하게 움직였다. 어떤 곳은 불타오르고 어떤 곳은 잔잔했다. 그려진 선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지만 결국 지우는 방향이 모여 그림을 완성했다. 방향을 따르거나 선택하지 않고, 나의 방향을 만드는 일이었다.
작가약력
국동완 (Dongwan Kook) 1979년, 서울 출생
국동완은 드로잉, 페인팅, 조각, 책 작업을 통해 무의식과 무의식에 접근하는 과정을 다룬다. 2007년부터 지속해오고 있는 꿈 아카이브 작업은 자신과 꿈의 관계를 언어와 기억의 자의적 관계에 빗대어 책과 조각의 특성에 녹여낸다. ‘자유 연상’을 활용하는 드로잉 ‘회광반조回光返照’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도구이며, 작가는 이렇게 건져 올린 무의식을 자세히 관찰하는 방법으로 드로잉을 수백 배 확대하는 회화 시리즈를 전개한다. 꿈을 다루면서 단련된 시선을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사회 현상으로 옮기며 개인과 사회의 조형적 접점에 주목하고 있다.
학력
2008 MA 북아트(Book Arts)전공, 캠버웰 컬리지 오브 아트, 런던 예술대학, 영국
2005 BFA 시각디자인 전공,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한국
개인전
2022 《방향 연습》, 누크갤러리, 한국
2021 《I Promise I Stay》, 피비갤러리, 한국
2020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플레이스막2, 한국
2018 《900x Magnification》, 갤러리 수, 한국
2016 《The Automatic Message》, 갤러리조선, 한국
2011 《Some Dreams Don’t Come and Some Dreams Don’t Go.》,갤러리팩토리, 한국
프로젝트
2021 《MMCA 랜선 창작실 국동완 작가편: Dreamer’s Drawing Book》,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2021 《讀소리: 국동완 x 장기하》,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재단, 한국
2020 《문학카바레: 불균등한 반쪽들》, 실시간 온라인 낭독 퍼포먼스, 한국
2020 《유아예술프로젝트: 일상과 예술의 만남》, 서울문화재단, 한국
2020 《창동레지던시 배너프로젝트》,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한국
2020 《달콤하고 쌉싸름한 나만의 미술관, 컬렉션, 이야기》,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재단, 한국
2020 《현대예술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파랑고래, 한국
2020 《이후의 사람들》, 안산시청, 한국
2017 《침몰한 여객선에서 건져 올린 것들》, 더북소사이어티, 한국
출판
2020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바운더리북스 ISBN 978-89-967937-3-1
2019 『햇빛세입자』 알마 ISBN 979-11-599226-8-8
2016 『침몰한 여객선에서 건져 올린 것들』 바운더리북스 ISBN 978-89-967937-1-7
2016 『The automatic message』 바운더리북스 ISBN 978-89-967937-2-4
2011 『Some dreams don’t come and some dreams don’t go.』 바운더리북스 ISBN 978-89-967937-0-0
레지던시
2020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한국
2016~2018 금천예술공장, 한국
2012 글렌피딕 아티스트 레지던시, 스코틀랜드, 영국
방향 연습 #1, Sense of Direction #1, Colored pencil on paper, 54x65cm, 2022
방향 연습 #5, Sense of Direction #5, Colored pencil on paper, 54x65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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