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으로 승부하는 작가 여소현, 전쟁과 갈등의 시대에 희망을 그리다
전 시 명 l 여소현展 : Hope
작 가 명 l 여소현 / YEO, Sohyun
기 간 l 2024.12.4 (수) - 2024.12.18 (수)
장 소 l 동숭갤러리
우리나라의 지방 방언으로 알려진 ‘입댈 것 없다’라는 형용어는 객체에 인간을 대치시킬 때 ‘더 이상 군소리가 필요가 없는 훌륭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입댈 것 없는 작가’ 여소현은 아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품세계와 작가정신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으며, 많은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으며 조용히 그들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흔치 않은 작가입니다. 그 이유는 ‘입댈 것 없이’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매력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2년 전 같은 장소에서 ‘Love 사랑’을 주제로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겪던 우리와 이웃들에게 위안을 전하는 전시를 열었습니다. 이후, 국내외적으로 갈등과 전쟁으로 인한 절망의 길목에 선 시대 속에서 그는 ‘Hope 희망’이라는 주제로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며 예술적 구도자라는 새로운 면모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의 감성(sentiment)과 자연의 이성(nature)이 치열하게 교차하며 화합을 이루는 작품들이 공개됩니다. 각각의 작품은 관람ㅊ자에게 강렬한 감정적 해방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그의 깊어진 예술관과 작가정신을 담아냅니다. 초기작의 적나라한 나체에서 보여진 원초적 미감에서 근대적 낭만과 계몽적 인식을 지나,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까지 폭넓게 확장되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기대는 한마디로 괄목상대(刮目相對)입니다. 그는 20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세계 미술의 주류인 ‘표현주의’의 한국적 수용을 넘어 세계무대에서 K-미술의 성공을 이끌어 나갈 작가가 분명합니다.
이번 전시는 동숭갤러리에서 12월 4일부터 18일까지 2주간 진행됩니다.
- 동숭갤러리 큐레이터실
바람부는 날_캔버스에 석채,과슈,먹_53.0x45.5cm_ 2024
Before sunset I_캔버스에 석채,과슈,먹_53.0x45.5cm_2024
희망 - ‘몸이 된 풍경’이 전하는 메시지
김성호 Sung-Ho KIM |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여소현은 그동안 인물을 중심으로 인간, 동물, 식물, 풍경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현대적 수묵 채색화를 선보여 왔다. 그것은 대개 감정이 분출하는 붓질의 표현주의적 인물이나 원초적 순수함이 일렁이는 아르 브뤼(Art Brut)의 분위기를 담은 인간과 모든 비인간의 관계를 탐구했던 작업이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풍경이 전면에 나서는 새로운 작업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새로움이란 이전의 자유로운 심상의 표현주의 언어를 밀쳐두고 자연의 깊고 내밀한 자리로 들어가서 명상과 수련에 가까운 정밀한 재현의 언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여소현이 이번 개인전에서 표현보다 재현의 언어에 집중한 까닭은 무엇인가? 더러 표현주의 풍경 속에 인물이 뒤따르는 작업이 있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는 이전보다 정제되고 차분한 재현의 질서 속으로 잠입한다. 최근의 그녀의 이러한 조형 실험이 지니는 의미와 미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녀가 이번에 제시한 주제 ‘희망(Hope)’은 최근 작품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기도_캔버스에 석채,과슈,먹_53.0x45.5cm_2024
II. 인물 - 나의 변주 혹은 타자들
여소현이 풍경을 전면에 내세우기 이전의 작품 속 인물은 어떠했는가? 그 인물은 세계를 대면하는 ‘작가로서의 나’이거나 유년의 기억에서 소환한 ‘과거의 나’이거나, 내 속에서 발견한 ‘또 다른 나’라는 알터 에고(Alter Ego) 혹은 타자에 감정 이입한 페르소나(persona)처럼 변주된 자화상이기도 했다. 또한 그녀의 작품 속 인물은 사랑, 시기, 질투, 연민 그리고 희로애락을 나눈 연인, 가족처럼 ‘작가와 동일화한 타자’이거나 스치듯 지나간 느슨한 인연의 낯선 누구처럼 ‘작가와 비동일화한 타자’이기도 했다.
나의 변주이든 내게 소환된 타자이든 여소현의 작품 속 인물에는 뜨거운 피와 뜀박질하는 심장을 지닌 ‘몸이 된 주체’가 자리한다. 작가가 최근 개인전들에서 여러 번 내세웠던 주제가 ‘몸으로 전(展)하다’였던 것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몸이 된 주체’ 혹은 ‘육화(肉化)된 주체’, 간단히 말해 ‘육화 주체’가 지닌 의미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흔히 어떤 것을 상대에게 옮기어 주다”는 의미의 ‘전(傳)하다’라는 말 대신 그녀는 왜 “펴다, 벌리다. 구르다, 뒹굴다, 보이다”와 같은 의미를 담은 ‘전(展)하다’라는 용어를 그동안 주제로 삼았던 것일까? ‘몸으로 보이고 전시하다’로 해석되는 이 주제는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경험과 감정을 지닌 육화 주체’로서 세계를 대면하고 발언하는 작가의 자화상이거나 그것의 변주인 까닭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라고 설파했던 하이데거(M. Heidegger)의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라는 인간 존재론을 우리에게 되뇌게 한다. 하이데거의 ‘여기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다자인(Dasein)은 ‘몸을 지닌 실존적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전제한다.
여소현의 2011년 개인전 《기억을 걷는 시간》은 작가가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이나 과거 경험 속 자아를 소환하는 것이었고, 2012년 개인전 《Persona-나 혹은 너》는 작가의 ‘또 다른 나’를 찾는 과정이자 그녀가 경험했던 사건 속 타자와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이기도 했다. 2013년 개인전 《Before Sunrise》는 어떤가? 그것은 작가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그리는 이상 세계와의 만남과 어긋남에 관한 조형적 성찰이었다.
작품을 보자.
보색 대비가 역력한 표현주의적 붓질이 휘감고 있는 해학적인 모습의 아이 혹은 성인의 인물상은 저마다 지닌 경험적 이야기를 암시하는 듯,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야구모자를 쓴 소년’,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여인’, ‘Man in Suit’, ‘연인’, ‘고백’, ‘기도’ 등 다른 제목으로 제시된다. 기억에서 소환하는 과거 경험 속 주체적 자아이거나 타자의 초상인 그것은 두 명 이상의 군상이나, 인물과 동물이 한데 어우러진 이미지 속에서 더욱더 풍성한 이야기를 생산해 낸다. 왈츠를 추고 있는 남녀, 다정하고 따스한 포옹을 나누고 있는 남녀, 열정적으로 입맞춤하는 연인, 어깨를 기대고 있는 노부부, 새를 품에 안은 여인, 하늘을 나는 갈매기를 가리키는 아이, 자기보다 몸집이 더 큰 고양이를 끌어안은 소녀와 같은 인물 군상, 인물과 어우러진 동물 초상이 그것이다.
대개 스냅 사진처럼 화면 안에 가득 채운 이러한 인물이나 동물상과 달리, 바다나 산을 배경으로 한 남자나 연인처럼, 드넓은 풍경을 배경으로 한 채 작은 크기로 포착하고 있는 인물상은 ‘세계 내 존재’라고 하는 실존적 인간 존재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만들면서도, ‘인간은 자연의 부분이자, 곧 자연’이라는 스피노자(B. Spinoza)와 들뢰즈(G. Deleuze)의 사유 그리고 노,장자(老, 莊子)의 도가 철학과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공유하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전한다.
바늘꽃 I_캔버스에 석채,과슈,먹_72.7x60.6cm_2024
III. 풍경 – 상호 작용하는 육화 주체
여소현은 이번 개인전에서 인간을 품고 있는 근원적 모성 세계인 자연을 탐구한다. 새로운 출품작들은 이전의 즉발성의 표현주의 붓질이나 원초적 순수함을 떠올리는 아르 브뤼 분위기의 조형 언어를 벗고 정밀한 재현의 심층으로 깊게 내려앉은 새로운 조형 언어를 구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전과 다른 조형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전 인물상이 생동력 있는 ‘육화 주체’였던 것처럼, 이번 전시의 풍경 역시 ‘육화 주체’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풍경에서의 육화 주체? 그것은 ‘몸의 언어로 육화된 자연’을 의미한다. 미술에 있어서 몸의 언어로 육화된 사물 혹은 육화된 자연은 무엇보다 회화 표면의 질퍽하고도 거친 마티에르에서부터 기인한다.
여소현의 최근작에서 이러한 질퍽하고 일정 부분 거친 질료의 세계는 캔버스에 석채(石彩)와 과슈 그리고 혼합 재료가 낳은 결과물인 셈이다. 작가는 이러한 재료를 아교와 섞어 아사천 으로 된 캔버스 표면 위에 여러 겹 쌓아 올리면서 검은색으로 된 바탕 화면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자연 광석을 분쇄한 석분 자체가 지닌 마티에르도 그러하거니와 과슈와 같은 불투명한 물감을 여러 번 쌓아 레이어를 만든 질료감은 화면의 깊이감을 더한다. 이러한 초벌 작업은 화면에 형상을 올리기 전까지 지난한 노동과 고된 인내 그리고 마음을 갈고닦는 명상의 시간을 요청한다.
짙고 두껍게 올라선 질료감 가득한 검은색 바탕 화면 위에 안료와 과슈를 올려 바르면서 만드는 형상은 바탕색을 드문드문 남기는 까닭에 ‘흥미로운 비백(飛白)’의 효과를 낳는다. 즉 서화(書畫)에서 갈필(渴筆)의 농묵이나 담묵이 한지 위에 스치면서 드문드문 남긴 여백을 ‘비백’이라고 할 때, 그것이 한지 고유의 흰색이라고 한다면, 여소현의 작품에서 비백 효과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물감층을 만든 검은색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비백’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는 형상 안에 마치 공기를 불어 넣고 생명력의 숨통을 틔워주려는 듯, 검은 바탕면을 드문드문 남기면서 형상을 만들고 비백의 효과를 창출한다.
이번 전시에서, 숲속 바늘꽃 풍경을 클로즈업해서 정밀한 재현의 언어로 탐구한 신작에서도 비백의 효과는 드러난다. 다만 이전의 작품에서는 즉흥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붓질이 비백의 효과를 낳았다면, 이 바늘꽃 연작에서는 마치 ‘먹을 치듯이 그린 선묘’의 바늘꽃 이미지를 쌓아나가면서 검은색의 비백 효과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즉 이 새로운 연작은 창작 과정 중에 무수한 선의 중첩 사이에 숨통을 낸 검은색 바탕면을 살짝살짝 드러내는 비백 효과를 낳거나, 화면을 긁어내어 검은색의 밑면을 드러내는 형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비백 효과를 창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백 효과는 보색이 현란하게 교차하는 작업이나 검은색으로만 된 작업에서도 다른 방식이지만 동일하게 발현된다.
그러니까 여소현의 바늘꽃 숲을 가까이 탐구한 변주된 풍경화 혹은 현대적 산수화에서 ‘육화 주체’ 혹은 ‘육화된 사물과 자연’은 거친 마티에르의 질료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숨통을 내어주는 검은 비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녀의 작품 속 팽팽한 긴장감을 지닌 선묘로 검은 허공을 가르면서 쌓아 올린 바늘꽃 숲은 인간에게 그저 관조의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숨 쉬고 말하고 행동하는 또 다른 육화 주체로 자리한다.
이 글은 여소현의 바늘꽃 숲에서 메를로 퐁티(Merlau-Ponty)의 살(la chair)로서의 ‘육화 주체’를 떠올린다. 메를로 퐁티에게서 자연은 더 이상 종속적 관조의 객체(objet)가 아니라 인간과 대화하고 상호 작용하는 또 다른 주체(sujet)가 된다. 여소현의 이 작업은 그간의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초기 현상학을 탈주하는 탈인간중심주의 혹은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과 같은 후기 현상학을 실천하는 것처럼 육화된 채 나타난다. 마치 그동안의 전시 주제였던 ‘몸으로 전(展)하다’가 품은 미학적 함의처럼 말이다.
Wonderful days_캔버스에 석채,과슈,먹_72.7x60.6cm_2024
IV. 몸으로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여소현의 이번 개인전이 내세운 주제 ‘희망’은 배제되거나 억눌리고 종속된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한다. 인간의 관조와 종속의 대상으로 간주해 온 자연 풍경에 두꺼운 물감의 마티에르로 살을 입히고 비백 효과로 생명을 불어넣어 대화의 또 다른 주체로 되살리는 그녀의 자연 풍경은 재현된 것임에도, ‘몸이 된 주체’ 즉 ‘육화 주체’로 되살아난다. 그녀의 ‘신묘한 현대적 산수화’ 속에서 피가 돌고 심장이 뜀박질하는 육화된 자연 풍경이 되는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 희망은 풍경을 가까이서 대면하고 재현의 조형 언어로 성찰한 바늘꽃 숲과 같은 곳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이전의 표현주의적 인물화가 관계하던 타자 혹은 동식물과 같은 비인간적 타자에게서도 희망은 싹을 틔우고 자란다. 바닷가 암초에서 자라는 해초류, 해조류에도, 그 사이를 거니는 외로운 갈매기 한 마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그것들은 파도치는 바다나 저녁마다 찾아오는 노을을 혹은 매번 찾아오는 또 다른 갈매기나 어부를 반갑게 맞이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흰 구름을 수면 위에 드리운 강물 위에 고요히 떠 있는 작은 조각배는 어떠한가? 그것 역시 흰 구름이나 자기를 찾아올 두루미나 연인 한 쌍을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희망은 한 인물이 테이블이라는 사물과 맞닥뜨린 채 벌이는 소소한 사건 안에서도 전해진다.
여소현의 이번 개인전은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에 손을 내젓고 사물, 동식물 그리고 풍경을 친구로 부른다. 인간 주체와 대화를 나누고 상호 작용할 ‘몸이 된 주체’, 즉 ‘육화 주체’인 친구로서 말이다. 그렇다고 ‘알터 에고’라는 ‘또 다른 자아’로서의 인간 주체와 타자에 대한 희망의 끈을 절대로 놓지는 않는다.
우리는 현대적 한국화를 실천하는 여소현의 전시에서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 주체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더불어 그녀가 친구로 불러낸 수많은 ‘육화 주체’와 함께하는 따스하고 정감 가득한 이야기와 더불어 우리에게 ‘몸으로 전하고 시각화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어떠한 것인지를 진중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Be with you_캔버스에 석채,과슈,먹_34.8x27.3cm_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