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NANAN’S LONG LONG TIME FLOWER Public Sculpture ARCHIVES EXHIBITION
개관 1주년을 맞이한 에이피오프로젝트 APOproject에서는 11월 30일부터 12월 28일까지 나난의 시들지 않는 꽃 ‘롱롱타임플라워’ 공공조각 아카이브 전시가 열린다.
나난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공미술을 펼쳐온 작가로, 대한민국 최초의 윈도우 페인터로 이름을 알리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공공의 장소인 창문에 그림을 그리는 윈도우 페인팅을 통해 예술과 일상을 연결하는 새롭고 친숙한 형태의 예술로 다가갔다. 소중한 순간, 누군가에게 전하고픈 감사, 사랑의 마음이 오래도록 간직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선보이기 시작한 ‘롱롱타임플라워’ 작품은 나난의 대표작이다. 우리 모두가 힘들어 하던 코로나 시국을 이겨낼 때는 나난의 꽃으로 가득 채운 ‘국민 덕분에’ 공공 캠페인(보건복지부 주최, 교보생명 후원)을 펼쳤고 최근 ‘세송이물망초’의 정원 전시(통일부 주최, 서울시 후원)를 통해서는 납북자들을 잊지 말자는 캠페인성 전시이다. 이 외에도 여러 기관, 단체, 장소에서 뜻깊은 의미있는 활동을 지속하며 개인의 작품세계를 넘어 공공적 영향력을 깊이 고민해온 작가이다.
2020년 12월, 공공의 메시지를 작가의 언어이자 예술로 오래도록(영원히) 전달할수 있는 새로운 제안을 받게 된다. 공공조각 작품으로 높이 4.8m로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손꼽히는 영등포역 롯데백화점 앞 야외에 나난의 대표작 <Long Long Time Flower>가 공공조각 작품으로 설치되었으며, 이후 영등포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소명을 다시 한번 확고히 했다. 2021년 설치된 <The Tropical Forest 2021>을 통해 영원한 여름을 느낄 수 있는 열대의 자연 풍경을 선보였다. 바다, 모래, 나무, 이름 모를 꽃들까지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색감과 하모니를 담아낸 이 작품은 자연이 주는 치유와 기쁨을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 2024년에는 공동주택 입구에 대형 조각 작품을 설치하며 일상의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 작품은 집을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하루 행복하게 살아갈 행운을, 집으로 돌아오는 이들에게는 하루를 잘 마무리한 자신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나난의 활발한 예술 활동은 그녀의 작업 모티브와 철학에서 기인한다. 자연과 꽃을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은 그녀는 예술을 통해 세상에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자 한다. 그녀의 작품에는 경계를 초월한 따뜻한 메시지가 깃들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나난의 예술이 공공성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이다.
| 전시 평론 |
꽃: 대중의 반란 혹은 미학
김병수(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 …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기형도)
그래피티는 거리의 예술로 알려졌다. 나는 나난의 작업을 처음 접했을 때 그래피티를 떠올렸다. 기법만이 아니라 그의 이력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른바 스튜디오 아트와는 다른 루트를 밟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작품의 성격과 인공물의 자연주의라는 맥락을 떠오르게 한다. 미학과 예술은 다르다. 나난의 경로는 미학적인 것에서 예술적인 것으로 귀환과 순환 속에서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동시대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미적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간이 만든 산물인지 아닌지 자문해본 적이 없을 수 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다. 어떤 것의 미학적 본성을 정의하기 위해 그것을 생산적 지향성의 지평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돌릴 필요는 없었다. 지각의 인지적 차원은 확실히 미학적 관계를 확립하는 인식 행위와 얽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경험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사실상 얽힘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러한 얽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자연적인 것인지 인공적인 것인지 식별하지 못하더라도 미학적 특성으로 물체를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은 확실히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규칙을 확인한다는 의미, 즉 미학적 귀속은 동일한 대상을 종합적이고 단순하게 식별된 인간 행위의 전형적인 기능에 귀속시키는 것보다 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또한 문제의 규칙을 다음과 같은 용어로 진술할 수 있다. 미적 대상의 집합은 예술적 대상의 집합보다 더 넓다. 따라서 예술적 대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전에도 우리는 예술적 대상이 미적 대상의 하위 집합을 구성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몇 가지 특정한 특성을 공유하지만 다른 특성은 다르다.
미술의 기원은 플리니우스나 퀸틸리아누스가 기록한 전설에 따르면 회화에서 비롯한다. 회화의 출발이 한 여인의 애틋한 에피소드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연인과의 이별을 슬퍼하여 그의 실루엣을 벽에 남겨 그린 것이 그 시작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서양미술사에서 예술은 대상을 베끼어 자연을 모방하는 기술로 간주되었다. 모방의 기술은 모방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모방은 유희일뿐 로고스의 기술인 시학과는 구별되었다.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그린 공화국에서 예술가를 추방시킨 이유이다. 이후 유럽 예술의 원리가 근대에 서도 르네상스의 투시도법에 의한 트롱프뢰유의 기술로 발전한다. 나난은 자신의 그림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연히 친구의 집 유리창에 그린 것! 인터뷰에서 직접 들었고 다른 여러 매체에서도 반복된다. 광고를 전공한 그는 학생 시절 수업중에 “자신을 세일즈하라!”는 과제를 받는다. 이 지점을 현재 작가로서 출발점으로 스스로 지적했다. 광고, 매체, 대중, 세일즈, 자신(자기) 등등. 예술적 욕망과 의지가 모더니티와 만나는 현장이다.
나난의 세계는 예술로 귀환한 자연이다. 컨템퍼러리 아트는 예술성, 구성성, 비유기성을 찬양한 반면 미술의 모델이자 대상인 자연을 극단적으로 부정했었다. 물론 새로운 자연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미술과 미학 사이에서 자연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연미라는 개념은 상처를 건드린다. 이 상처는 순수한 인공물인 예술 작품이 자연 발생적인 것에 가한 폭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예술 작품은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외견상 만들어지지 않은 것, 즉 자연과는 대립된다. 하지만 순수 안티테제로서 이 둘은 서로를 의지한다. 즉, 자연은 매개되고 대상화된 세계 체험에 의지하고, 예술 작품은 매개되어질 직접성의 대리자인 자연에 의지한다. 그래서 자연미에 대한 숙고는 예술 이론에서 반드시 필요하다.”(아도르노) 이렇게 미술은 고도의 숙련성을 요구하면서도 자연스럽기를 원한다. 아마도 이 지점이 대중성에 대한 심각한 고려 사항일 것이다. 미술을 다루는 방송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자. “기자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 있는데, 기사를 뚜렷한 주제로, ‘중학생 정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 뉴스의 경우 여기에 단서 하나가 더 붙는다. 설거지를 하면서 ‘귀동냥하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니 복잡한 내용은 단순화해야 하고, 사안을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 있는 명쾌한 단어만을 동원해야 한다.”(박소영) 물론 대중성이 쉬워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코기토 에르고 줌’보다 명쾌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를 증명한다. 데카르트는 ‘생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나는 생각하다라는 단어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으로, 그 결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해하다, 원하다, 상상하다, 그뿐만 아니라, 감각하다 역시 여기에서는 생각하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내가 나는 본다. 또는 나는 걷는다는 것을 말하며, 거기에서 나는 존재한다를 추론하고, 내가 나의 눈 혹은 나의 다리를 가지고 행하는 행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이 결론은 아주 확실한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떤 의심할 것을 갖는다. 왜냐하면 나는 본다거나 걷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전혀 눈을 뜨지 않고 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냐하면 잠자면서 때때로 내게 일어나고, 아마도 같은 일이 내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나의 생각 혹은 감정, 다시 말하면 나는 본다 혹은 나는 걷는다처럼 여기게 하는 내 안에 있는 인식 행위에 대해 이해하는 대신에, 내가 의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같은 결론은 절대적으로 참이다. 왜냐하면 이 결론은 느끼는 혹은 생각하기의 능력을 유일하게 지니고 있는 영혼에 결부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유라는 거창한 낱말이 아니라 존재를 증거하는 생각으로 예술과 자연을 만날 때 다른 미학이 나타난다. 주체로서 생각하는 것은 어떤 확장, 데카르트 스타일로는 연장을 갖는다. 그것은 우연적인데 미적 대상으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예술이라는 관념을 창출한다. 기존의 미술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현된다는 의미이다. 미학—>예술—>미학으로 순환하지만 재귀적인 것과는 다른 해석학이다. 나선형적인 모양을 띠는데 그래서 단순히 진화론적인 입장과도 차이를 보인다.
나난의 작업은 꽃이다. 그런데 자연의 꽃과 예술의 꽃은 다르다. 자연의 미학과 예술의 미학. 실제로 이러한 구별은 확실히 개념적인 또다른 성격, 즉 자연과 예술 사이의 성격을 전제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제는 미적 경험의 전형적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개념적 구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 칸트 자신이 ⟪판단력 비판⟫에서 미적 판단 또는 취미 판단의 문제를 이미 언급한 후 §43에서만 이 구별을 추적하고 이를 네 가지 기준에 따라 분석했다는 점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네 가지 유형의 범주를 기반으로 설정된 순간이다. 칸트가 자연의 개념적 영역과 예술의 개념적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채택한 기준은 간단하다. 그것은 경험의 영역과 관련된 기준이며, 따라서 우리가 지각적 및/또는 인지적 관계를 설정하는 대상과 관련된 기준이다. 칸트에게 자연과 예술의 차이는 우리의 경험과 관련된 현상이나 대상을 생산하는 방식의 차이에 있다. 자연의 경우, 산물은 이러한 효과가 위치한 현상의 종류와 완전히 동질적인 원인과 과정에 기인하는 효과이다. 자연물에 있어서 효과와 원인 요인은 즉 동일한 현상계열에 속한다. 이 논제 덕분에 자연은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법칙을 지닌 효과군(칸트식 표현으로는 현상의 집합)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효과나 제품의 생성에 완전히 내재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개념적 맥락에서 그 과정의 역동성을 나타내는 행위는 효과를 갖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의 적절한 맥락은 효율성의 맥락이다. 자연과 인공 그리고 예술로 이어지는 미학에서 나난은 그 수사학을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꽃은 아름답다. 미의 상징이다. 나난이 대중과 소통하는 루트에는 꽃이 있다. 그런데 동시대 미학에서 미는 직접적인 대상에서 희미해졌다. 미적 지위가 약화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때 나난의 꽃은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우리는 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더 이상 확립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권위 있게 말해줄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을 동경한다. 미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자유와 소통의 생생한 긴장 관계 속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 생동적인 질서가 생기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관련된 사람들의 감정에서 비롯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을 지향한다. 그런데 이 이상은 실정법이나 율법의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치 있는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카를 브루너) 어떤 권위를 대신하는 상징으로서 미를 제시할 경우 그 권위의 실추는 미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의 상징보다는 미학적 알레고리는 우리 시대의 분위기가 되었다. 쉽게 말해서 진선미보다는 그 나름의 개성이라는 예술적 특성이 영향력을 갖는다. 이 지점에서 나난의 위치가 특이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정학적 미학에서 꽃이라는 상징을 통해 직관적으로 ‘위로’를 환기한다. 미적 체험이 제공하는 일종의 정화,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대단원이나 파국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밋밋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자극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있어서 평온함이 지속된다. 미학의 진리, 존재, 감각은 이제 캠프, 키치, 팝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바탕에는 젠더가 놓여져 있다.
지금까지의 나난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난의 작업은 현대 미학과 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는 내용을 풍성하게 한다. 미학적 사고와 예술적 경험이 어떻게 서로 얽히고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본문은 주로 예술과 자연, 그리고 미학적 경험에 대한 사유를 펼쳐가며, 나난의 작업이 단순히 예술적 표현을 넘어서서, 대중과 소통하고, 현대 사회의 감각적, 미학적 요구를 어떻게 반영하는지에 대해 성찰하고자 한다. 예술과 미학의 차이: 미학적 경험과 예술적 경험은 다르지만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미학은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대상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그 아름다움과 감동을 어떻게 체험하는지를 다룬다. 반면, 예술은 이러한 미학적 경험을 통해 인간 존재와 사회적 관계를 탐구하며, 때로는 그 미학적 특성을 통해 더 깊은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전달하려 한다. 나난의 작업은 이러한 두 개념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특징이 있다. 자연과 예술의 관계: 예술은 자연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아도르노의 말을 빌리면, 예술은 자연과 대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나난의 작업이 자연미와 예술미를 넘나드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나난의 작업과 꽃: 나난의 꽃은 단순히 자연의 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꽃은 전통적으로 미의 상징이었지만, 현대 미학에서 미는 더이상 단순히 대상의 아름다움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나난은 꽃을 통해 미학적 경험의 깊이를 탐구하며, 미학이 어떻게 예술적, 사회적 상징으로 기능하는지를 보여준다. 대중성과 예술: 나난의 예술이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은 미학적 체험의 특성과도 연결된다. 그는 광고와 대중매체에서 다룬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적인 언어와 형식을 예술에 접목시켜, 미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예술적 경로를 제시한다. 미의 상실과 예술의 특성: 본고는 미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상징적인 존재로서 대두되지 않는 현재의 미학적 상황을 언급하면서 대신, 개성이나 알레고리 같은 예술적 특성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나난의 작업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의 상징보다는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경험을 강조하며, 그것이 대중과의 깊은 소통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요약하자면 나난의 예술은 자연과 인공, 예술과 미학, 대중과 개인을 넘나드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미학적 경험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현대 미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미와 예술미, 그리고 그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예술이 단순히 미적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과정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는 미학이 마음에 드는 옷을 입는 것, 맛있는 것을 먹는 것,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것 등등, 이런 일상의 다양한 미적 선택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져오는지 해명하려 한다. 세련되고 촌스럽고 멋지고 시시하다는 이런 나날의 감동을 왜 소중히 여기는가. 생활의 색채에 묻어 있는 의미를 묻는 새로운 철학이 미학이 됐다. “미학은 미를 창조하거나 감상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든 그 태도나 자세에 의문을 품고 생각하는 이의 것이다. 사상은 감상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예술가의 마음을 언짢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예술가가 무슨 일을 하며, 또 그들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사상적으로 파악하려할 때에 더 그렇다. 사상가는 아무리 예술가에게서 놀라움을 발견하고 또 예 술가의 관점에 선다 하더라도 그의 환상적 자세를 옳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술가의 태도는 뚜렷하다. 그는 내면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패하지 않는다. 그는 이 내면적 필연을 하늘이 주는 선물인듯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예술가의 자세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다.”(하르트만) 일상성의 미학화 속에서 예술의 미학을 접속시키는 방식이 나난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콜라보레이션이라는 이름의 협업은 단순히 같이 혹은 함께 일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데 거기에서도 나난의 특별한 점을 보게 된다. 예술가로서의 퍼스낼리리티와 퍼블리시티를 절묘하게 배합하는 감각은 일종의 대중 미학이라고 부를만하다. 상대가 공적 기관이기도 하고 기업이기도 한데 파트너십 속에서 대중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테크놀로지와의 관계 또한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한다. 물론 이 지점은 좀더 예민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초 보편교육이 제도화되면서 글을 읽고 음악을 듣고 미술과 공연을 감상하는 등 문화를 향유하는 능력이 더이상 특정계급에 속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말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로 영상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즐길 수 있는 길이 훨씬 넓어졌다. 이제는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장벽자체가 사라지는 추세다. 대중문화 자체가 고급문화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정보라) 거의 100년 전인 1930년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간행한 ⟪대중의 반역⟫은 이미 이런 국면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또 츠베탕 토도로프 등의 ⟪개인의 탄생⟫에 의하면 현대의 민주사회에서 인간은 평등하고 자율적이고 독립된 존재인데 그것은 세계와 인간에 관한 인간 자신의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변한 결과이다. 전근대적인 인간 이해 방식이 근대적 인간의 개별성으로 변화를 꾀했다. 개별성은 칸트가 말한 미학적 체험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어떠한 추상적 개념으로도 환원되지 않고, 어떠한 실천적 목표, 육체적 욕구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 미학적 경험은 그 대상의 개별성을 향한다. 즉, 예술 작품은 개별성과 동시에 보편성을 지닌다. 나난이 자신의 작업에서 지향하는 바가 예술적 개성과 공동체의 대중성에 대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밝혔을 때 이 지점을 지적한 것으로 여겨진다. 개인과 대중이 유지하는 관계는 아주 특이하다. 그것은 전체와 부분의 구도가 아니다. 단지 보편과 특수 또한 벗어난다. 아마도 동시대 미술의 정치성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미술사는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인물들로 가득 차 있지만, 미술은 계몽된 개인처럼 자율적이다.”(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