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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전:구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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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영화 ‘거짓말(감독:장선우, 원작:장정일, 주연:이상현, 김태연(1997))’을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유럽 내 Fluxus의 활동기지였던 프랑스 파리의 Galerie J&J Donguy에서 1995년 동양인 작가로서는 유래 없는 개인전 “Earth Moon Rising (La Terre- Lune se levant)" 을 성공리에 마친 후 1996년 프랑스의 유력지 르 피가로지가 차세대를 이끌 예술가로 선정한 스타 작가 이상현을 기억하는가? 이상현은 탁월한 상상력의 소유자이자 타고난 이야기꾼이지만 이면에는 예술가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파란만장함을 겪은 야누스적인 면모의 작가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예술가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가령 불운한 천재 예술가로서의 표상이자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이중섭, 권진규, 또는 오윤의 예가 있는가 하면 비록 극히 소수이지만 엘리트 예술가로서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성공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사례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재능이 넘치는 수없이 많은 작가들이 해가 뜨면 달이 지듯 명멸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롤러코스트에 올라 타듯 작금의 예술계에서 이미 극과 극의 부침을 겪은 그의 예술 세계의 좌표를 다시 가늠해 보고자 그의 12번째 개인전 ‘구운몽’을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에서 개최한다.


그는 1980년대 초반부터 사진, 입체, 설치, 퍼포먼스, 영상, 조각 등 시각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업을 전개해 나가고 때로는 당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빌어 독특한 아이디어를 실현하기도 한다. 그는 일찍이 자신이 직접 설계, 고안한 「時空間移動號 (TAPACEMENTOR: Time Space Movement의 합성어, 토탈미술관, 1988)」를 타고 상상 속의 시공간을 여행-조선역사명상열전, 갤러리 조선, 2005-하였다. 물론 여기서의 여행은 퍼포먼스와 설치작품 속에서 상세한 자료를 통해 제공되는 정보를 근거로 관객이 자신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가능하게 한다. 즉 행위자나 관객 모두에게 있어 상상 속의 여행인 것이다. 이때 관객은 상상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도 모르게 그의 작업에 참여하게 되며 이와 같은 일련의 작업을 통해 작가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은 바로 상상과 환상의 세계로의 여행이다. 


이 전시 “九雲夢(구운몽: Nine Clouds Dream)”은 개인의 현실과 꿈의 사이에서 맴도는 유동적인 이미지이자 혼재하는 의식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매일 꿈을 꾸지만 또한 꿈에서 깨어난 후 혼잡한 일상의 현실과 대면한다. 일찍이 莊子(장자)가 胡蝶之夢(호접지몽)의 우화를 통하여 들려주었듯이 반대로 일상이 단지 꿈과 꿈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꿈은 단지 가두어두기 어려운 환상일 수 있고 프로이드의 말처럼 깊이 숨겨놓았던 욕망과 잠재의식의 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현실과 떨어져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당신의 꿈 사이에서, 그리고 환상과 실재 사이에서 이미지들은 뿌유스름하게 부유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꿈과 또 다른 꿈을, 그리고 아득한 환상과 이 지구 위에 닻을 내린 실재 사이를 이어준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초현실적이라기 보다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그것들과의 등가물로서 그 사이의 간격을 메워 준다고 할 수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본래 구운몽은 조선 중기 고위 관료이자 영남학파의 거유였던 서포 김만중이 쓴 최초의 본격적인 한글소설이다. 제목의 '구운(九雲)'은 주인공 성진과 그의 부인인 팔선녀를 가리키며, 인간의 삶을 나타났다 사라지는 구름에 비유하고 있으니, '구운몽(九雲夢)'은 결국 이들 아홉 사람이 꾼 꿈이다. 이 작품에서는 인생무상, 일장춘몽, 즉 인생의 덧없음이라는 주제를 주인공 성진의 하룻밤 꿈을 통해 보여준다. 이 신작 ‘구운몽’ 시리즈에서 그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통해 지독한 현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아이러니와 바람 앞의 갈대처럼 세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모습을 한갓 일장춘몽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다. 


이 시리즈에는 날 생선살 같은 키치적 이미지의 의상과 소품으로 무장한 팔선녀(여고생)와 바늘 없이 낚시하는 작가 자신(성진), 그리고 탈것이자 타임머신인 시공간이동호가 등장한다. 또한 소설 구운몽이 가지고 있는 환몽구조처럼 작가의 전작들에서 생성된 이미지를 곳곳에서 다시 차용하고 있다. 여고생들은 작가의 전작 리틀 싯타르타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그 소녀들이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의 작품 속으로 돌아왔다. 마치 성진이 그러했듯이 이 소녀들은 꿈 속의 꿈처럼 잡을 수 없는 존재이다. 작가는 내레이터가 되어 작품 속을 주유하며 때로는 도화꽃잎이 떠내려오는 강가에서, 쇠락한 성벽에 걸터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등장인물 외에도, 보다 복잡한 복선과 상징, 그리고 암시들로서 이야기 구조를 촘촘한 그물처럼 짜내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상에 흔하게 돌아다니는 한국산 중국무협게임 배경에서 차용한 공간들은 때로는 작품 속에서 무릉도원이 되고, 이름 모를 중국풍 건물과 성벽으로 둘러 쌓인 궁궐이 되기도 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왜 우리나라에서 만든 컴퓨터 게임조차도 우리나라가 배경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숙종 때의 인물인 서포 김만중은 왜 소설의 배경을 중국 당나라 때로 그렸을까? 김만중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상, 그리고 모화주의에 젖은 학자로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비록 조선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향으로서의 도원은 마땅히 과거의 중국 땅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정이 이와 같은데 과연 이 구운몽에는 조선의 현실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하면 비록 그림이지만 겸재 정선은 진경을 추구하였다. 한국 땅에 앉아 중국 화첩을 들여다보며 중국 산과 강을 그리던 짓을 버리고 눈 앞의 풍경을 본 대로 느낀 대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대주의의 눈가리개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시켜서 꿈 속에서 본 이상향을 맑은 냇물 위로 복사꽃이 떠내려오는 무릉도원으로 그려내게 했다. 만약 안평대군 또는 김만중이 오늘날 살아있어서 오로지 잘 먹고 잘사는 게 목표인 요즘 세태대로 이상향을 찾는다면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강남이야 말로 현세의 무릉도원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곳에 빗대어 그는 우리의 정체성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또한 묻는다. 근대 이후 우리가 일본, 미국, 그리고 이제는 현대 중국의 거대한 힘에 눌려 정신을 빼앗기고 본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을 역사 속의 한 시간과 현재의 모습의 레이어를 겹치어 보이며 오히려 가려진 모습을 들추어내어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틀기도 한다. 그래서 정선의 옛 압구정 그림과 나란히 고층 주상복합 빌딩 숲의 풍경을 병치시켜서 수백 년 전과 다름없이 물질의 허상을 쫓고 세태에 쉽게 휩쓸리는 변화하지 않는 시대상을 우스꽝스럽게 들춰내고 있는 것이다.


이상현은 꿈의 각각 다른 일면을 보여주며 우리의 욕망을 대변한다. 통념이나 사회적 기준의 명확함을 모호함으로 대치시키거나 시간의 흐름을 도치 시킨다. 고도의 나르시스트로서 자유자재로 이미지를 사용하고 꿈과 실재를 혼합하기도 하여 끈적한 욕망을 뻔뻔하게도, 그렇지만 화사하게 전면에 내세우기도 한다. 작가의 꿈은 더욱 깊어지고 짙어져서 줄지어 선 봉우리들을 이룬다. 그 사이로 우리가 걸어 들어가도록 열어둔 문이 있고 이상현은 당신을 그곳에서 산책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 문을 들어서는 순간 당신의 환상적인 여행의 시작이 될 것이다.


   최근 이상현의 작품을 초대하는 전시들이 국내외에서 집중적으로 열리고 있다. 갤러리 선컨템포러리의 개인전을 필두로 중국 북경의 따산쯔 페스티발의 일환으로 5월부터 798예술단지 안에 있는 티먼 갤러리에서 열리는 기획전 “Parody @ China”에 초대되었다. 이 전시는 대만에서 같은 주제로 동시에 열리게 된다. 그리고 6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의 초대전과 독일 칼스루헤의 ZKM에서 열리는 대규모 기획전 “Thermocline: 새로운 아시안의 물결” 전에도 역시 초대가 되어 “리틀 싯타르타”(2006)와 “조선역사명상열전”(2005), 그리고 다큐멘타리 영화”조선의 낙조”(2006)를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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