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세상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잡아매는 것은 무심히 스치는 사람들을 잇는 느슨하고 투명한 망(網)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정세랑, 『피프티 피플』, 창비
오늘 아침 버스에서 무심히 스친 사람을 내 인생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감히 ‘아니다’라고 대답하겠다. 한 사회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은 ‘느슨하고 투명한 망’에 의해 얽혀 있다. “‘나’는 ‘남’이 아닌 점에서 ‘나’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러한 점에서 ‘나’는 ‘남’과 ‘이미’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손병희, 2010) 인간은 외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이 관계를 다루고 있는 세 권의 예술 서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서배스천 스미 저, 김강희〮박성혜 역, 『관계의 미술사』, 앵글북스, 2021
『관계의 미술사』는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마네와 드가’, ‘마티스와 피카소’, ‘플록과 드쿠닝’ 그리고 ‘프로이트와 베이컨’, 총 네 쌍의 라이벌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거장들의 삶 저변에 깔린 ‘느슨하고 투명한 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앙리 마티스, <흰색과 핑크색의 두상>, 1914, 47x75cm, 캔버스에 유채
저자는 <흰색과 핑크색의 두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입체주의의 프리즘을 거친 방법으로 창작되었다는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윤곽선 밖으로는 각진 모양이 돌출되어 있고 배경과 전경의 구분이 모호하다. 또 서로 교차하는 선들은 일정한 리듬감을 생성해내고, 입술과 눈은 쉽게 그린 듯한 정제된 상징으로 대체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피카소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기존의 여타 미술 서적 속 작품 설명과는 다른 양상이다. 서술의 주체가 되는 것은 작품이 아닌 피카소와 마티스의 관계다. “나는 미술사엔 교과서가 외면하는 친밀감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친밀감을 의미 있게 다루기 위한 시도다.” 라는 저자의 말처럼, 『관계의 미술사』는 화가에게 영향을 끼친 주변 인물들에게 넉넉한 지면을 할애한다. 그들의 관계는 아직 탈고를 마치지 않은 상태다. 증오, 애정, 만남, 결별, 존경 등의 다채로운 감정이 교정되지 않은 채 무질서하게 혼합되어 있다. 책 속의 화가들은 때때로 비합리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평범한 인간이기에 그 사이에서 얼핏 빛나는 그들의 천재성이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다만 책에서 언급되는 작품에 대한 정보가 현저히 부족하다. 도판이 제대로 실려 있지 않은 작품이 태반이고, 작품에 대한 묘사는 서술되었으나 작품명이 언급되지 않은 경우도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인간과 죽음의 관게
이연식, 『죽음을 그리다』, 시공사, 2021
죽음은 늘 우리 곁에서 흐르고 있다. 다만 인지하지 못하거나, 일부러 피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그리다』는 미술 작품을 매개로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우리가 유보하고 있던 죽음과의 관계 정립을 시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책이다. ‘죽음을 맞이하다’, ‘순교자와 암살자’, ‘죽음은 검정’, ‘나를 죽이다’, ‘죽어 가는 사람을 그린 화가’, ‘애도와 매장’, ‘유령’, ‘돌아온 망자’라는 8가지 주제로 죽음에 관한 여러가지 양상을 예술 속에서 포착한다. 저자는 “죽음의 과정을 손에 잡힐 듯이 다시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죽음을 그리다』를 읽는 시간은 막연하게 느껴지던 죽음과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명확한 해설서가 아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훌륭한 길라잡이다.
저자는 작품에 담긴 죽음을 설명하며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덧붙인다.
에두아르 마네, <자살한 사람>, 1877년경, 46x38cm, 캔버스에 유채
(…)반면 마네의 그림 속 죽은 이들은 너부러져 있다. 어떤 영웅적인 면모도 없다. 거창한 이야기도, 도덕적 교훈도 없다.
이야기가 없는 죽음을 견뎌야 할 시대가 당도했다.
그러나 작품 속 장면을 ‘이야기가 없는 죽음’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그의 신원을 증명할 단서들이 적기에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한 인간의 이야기가 사장되지 않기 위해서는 외부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삶의 증거들을 확보해두어야 한다. 그 증거를 기반으로 철저히 익명화된 죽음 속 이야기를 발굴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삶의 증거를 남기고 있을까.
인간과 예술의 관계
윤혜정,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을유문화사, 2020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은 예술 거장 19인과의 인터뷰를 담은 책이다. 저자와 인터뷰이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작품관을 비롯한 세상에 대한 소신, 삶을 대하는 태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타인의 소견을 이끌어내는 저자의 탁월한 질문들이 돋보인다.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가는 곧 삶입니다. 그리고 예술가란 바로 일상의 예술적 속성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김수자 작가의 말이다. 인터뷰 내용에 담겨 있는 “예술가들의 명견만리”를 들여다 볼 때면, 삶과 예술을 향한 그들의 집요한 탐구정신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예술을 결합시킨다. 그 접합부에서 작품의 형태를 빌린 삶의 증거들이 탄생한다.
인터뷰이 중 한 명인 화가 장-필립 델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 삶에 영향을 준 예술가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진화하는 나 자신을 기록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거든요.” 우리는 그처럼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는 과정 속에서 진화한다. 이제는 내가 무엇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한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지 자문해볼 차례다. 그 고찰의 여러 사례들을 『관계의 미술사』, 『죽음을 그리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에서 참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정세랑, 『피프티 피플』, 창비, 2016, p392-393
서배스천 스미 저, 김강희〮박성혜 역, 『관계의 미술사』, 앵글북스, 2021
이연식, 『죽음을 그리다』, 시공사, 2021
윤혜정,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을유문화사, 2020
손병희 (2010). 김춘수의 시와 타자의 문제. 국어교육연구, 47, 299-320
김민정 mntil4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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