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성연
예술의 사랑법
심성연 tlatjddus00@naver.com
최근에 논란과 함께 흥행을 달리고 있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고 왔다. 단순 남성과 여성의 로맨스 영화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 작품은 사회적 시선에 눈치를 보며 살아온 성소수자 남성과 밝아 보이지만 내면의 상처가 깊은 한 여성과의 우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표면적으로는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와 진실을 마주하며 그들은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깊다.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예술의 역사를 들춰보면 '사랑'이라는 주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창작자들의 가장 큰 영감이자 모티프였다. 시인들은 사랑을 노래했고, 화가들은 사랑을 그렸으며, 조각가들은 사랑을 새겼다. 하지만 그들이 표현한 사랑의 형태는 결코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될 수 없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 오래된 주제에 새로운 시선을 더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이란 반드시 로맨스여야만 하는가? 서로 다른 두 영혼이 만나 치유하고 성장하는 과정,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알던 사랑의 형태를 넘어선 더 깊은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질문은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미술사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온 예술가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자신만의 사랑법을 예술로 승화시켜왔다.
이 영화를 보며 문득 떠올린 작품이 있다. 1990년대 개념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쿠바 출신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1957-1996)의 작품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1991)이다. 79.3kg(175파운드)의 사탕더미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작가의 연인 로스 레이콕이 에이즈에 걸리기 전, 건강했을 때의 몸무게를 상징한다. 관람객들은 자유롭게 사탕을 가져가고, 전시가 끝나면 줄어든 사탕만큼 다시 새롭게 채워진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죽음 앞에 소멸되는 육체를 의미하지만, 다시 채워지는 사탕을 통해서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끊임없이 채워지고 비워지는 사탕더미는 마치 우리의 기억처럼, 사랑하는 이의 존재를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만드는 의식 같다.
이 작품이 1990년대 미술계에 가져온 작은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통상적으로 미술관에서는 작품의 보존과 보안을 위해 관객이 작품을 만지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철저히 금지한다. 그러나 토레스의 작품은 이러한 경계를 과감히 허물었다. 작가는 정형화된 형태를 사회의 권위로 보았고, 관객의 작품 개입을 통해 의도적으로 이를 흐트러뜨림으로써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다. 즉, 사회적 편견을 극복해보고자 한 작가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토레스는 사탕이라는 소재를 특별하게 선택했다. 사탕은 연인을 향한 애정 어린 애칭이자 달콤한 추억을 상징한다. 이처럼 일상적이면서도 친밀한 오브제를 통해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과 상실의 경험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로 승화시켰다. 관객들은 사탕을 집어들며 자연스럽게 작품의 의미에 동참하게 된다.
작품의 깊이는 그것이 제작된 시대적 맥락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1980-90년대 미국은 에이즈 위기의 절정기였다. 특히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질병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로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유색인종이자 성소수자였던 토레스에게 로스는 단순한 연인 이상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미국 사회 속에서 이해받을 수 없었던 정체성을 가진 토레스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준 존재였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영화 속 여주인공 대사 中) 마치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성소수자 남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지하는 여자 주인공처럼 말이다.
토레스의 작품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당시 사회가 외면했던 소수자들의 사랑과 상실을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성소수자의 사랑에 관한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그저 한 인간을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사회에 존재하는 조금 다른 타인의 모습을 이해하고 예술로 일상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했다.
한편, 덴마크의 화가 게르다 베게너(1886-1940)는 캔버스를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보여줬다.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했던 그녀의 감각은 인물화에 독특한 세련미를 더했다. 특히 남편 릴리 엘베(본명: 에이나르 모겐스 베게너)의 초상화 연작에서 그녀만의 섬세한 시선이 돋보인다. 게르다는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양식의 영향을 받아 간결한 선과 기하학적 패턴 그리고 대담한 색채로 릴리의 여성성을 우아하고도 강하게 표현해냈다.
처음에는 단순히 여성 모델이 필요했던 게르다의 부탁으로 시작된 작업이었지만, 이는 릴리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게르다가 여장을 한 릴리의 모습을 얼마나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그려냈는지다. 그녀의 작품들은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용을 보여준다. 게르다의 화폭 속에서 릴리는 점차 더 자연스럽고 당당한 여성의 모습으로 변모해간다. 이는 단순한 외형의 변화를 넘어, 한 인간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렇게 게르다는 릴리를 자신의 작품에 자주 등장시켰고, 게르다의 붓 끝에서 릴리는 마침내 가장 자연스럽고 진실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과 예술은 당시 사회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릴리의 성전환 수술로 인해 두 사람의 결혼은 무효가 되고 말았지만, 게르다의 초상화들은 여전히 사랑하는 이의 본질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했던 한 예술가의 시선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부터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사탕 설치미술, 그리고 게르다 베게너의 초상화까지. 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두 주인공의 우정, 토레스는 사탕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게르다는 캔버스와 물감을 통해.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랑은 결코 하나의 형태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때로는 연인 간의 로맨스로, 때로는 깊은 우정으로, 때로는 한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으로 표현된다. 이 모든 형태의 사랑은 동등하게 아름답고 숭고하다.
예술은 우리에게 더 넓은 관점으로 사랑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포용적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사랑의 형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아닐까.
참고
https://brunch.co.kr/@paikyeon/26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0809
https://blog.naver.com/misoolin25/222102006001
https://brunch.co.kr/@17d063616aff40e/460
박수횬, 박숙영, 「곤잘레스-토레스의 사탕 연작에 나타난 ‘소모’로서의 ‘비정형’-조르주 바타유의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기초조형학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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