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전시 참여작가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작품 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마티아스 그뢰벨: 노이즈(Noise)
송가희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Pansori, a soundscape of the 21st Century》(2024)은 ‘공공장소에서 나는 소리’라는 뜻의 판소리를 주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연대, 그리고 그들이 향유하는 공통의 장소를 전시로 풀어내고자 했다. 본전시는 총 <부딪침 소리>, <겹침 소리>, <처음 소리>라는 세 가지 섹션으로 나눠졌다. 마티아스 그뢰벨(Matthias Groebel, 1958~)의 작품은 <부딪침 소리> 섹션에 놓여있었다.1) 무수한 것들이 밀접하게 교차하는 현대 사회 속 인간의 위치와 개입에 대해 다룬 섹션인 만큼, 그뢰벨의 작업 역시 영상과 이미지, 회화의 교차점을 드러내며 ‘노이즈(Noise)’를 발생시킨다.
그뢰벨은 독일의 아헨(Aachen)에서 출생했으며, 약사로 활동하다가 그림을 시작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텔레비전 영상 속 한 장면을 캔버스에 옮기는 기계를 고안했다. 기계는 작가가 설정한 크기의 캔버스에 맞게 아크릴 물감의 에어브러시 권총을 여러 겹 쌓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그뢰벨은 작업을 하기 전, 소리를 끄고 텔레비전을 본 뒤, 가장 뇌리에 남는 장면을 선정함으로써 그 장면을 영상의 서사로부터 분리한다. 이와 같이 내러티브에서 추방된 장면은 또 다른 이미지나 텍스트, 효과들과 함께 중첩 및 콜라주 됨으로써 또 다른 독자성을 갖는다.
작가는 2000년대 이전까지는 주로 영상 속 인물들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했는데, 이때의 인물들은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또한 작가는 자정을 넘긴 시점에 방영됐었던 다소 덜 대중적이고 공익적인 프로그램들을 많이 참조했기에 더욱 단번에 알아보기 어려운 인물들이 대다수였다.2) 최근에 진행된 개인전 《날씨의 변화 A Change in Weather》(2022.12.10-2023.02.26)에서의 작품들과 뉴욕 울릭(Ulrick)에서의 《마티아스 그뢰벨 MATTHIAS GROEBEL》(2023.9.21-11.11)에 출품된 <무제(156) Untitled(156)>(1995), <무제(149) Untitled(149)>(1997) 등에는 이와 같은 특징이 잘 보인다.3) 영상 속 인물들은 그뢰벨이 고안해 낸 자동적 기계장치로 옮겨져 캔버스라는 새로운 장소에 안착한다. 이들은 텍스트와도 혼합되며 탈맥락화되는 동시에 새로운 맥락 곳곳에 침투한다. 가령, 필자만 해도<Untitled(156)>(1995)에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와 함께 적혀있는 'Bird Man'에서는 ‘고통 속에 잠재된 희망’을, <무제(149) Untitled(149)>(1997) 속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남자와 텍스트 “Call from Singapore'에서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적 서사를 부여한다. 이처럼 그뢰벨의 작품은 원본과 복제, 분리와 혼합의 방법으로 저마다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생성한다.
작가의 이러한 재맥락화 방법은 화면에 표현된 효과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래된 사진이나 영상에서 화면을 구성하는 픽셀이 깨지고 흩어지는 느낌의 흔히 ‘노이즈 효과’ 가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보다 잘 전달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노이즈(Noise)’는 소음·잡음을 뜻하는 단어로, 컴퓨터를 비롯한 전기, 전자 장치의 잡음 및 이와 같은 기기의 동작을 방해하는 전기신호를 의미한다.4) 그뢰벨의 작품 속 곳곳의 작은 공백들은 마치 이러한 노이즈와 같이 매체와 서사들의 변환 과정 속 불완전성과 오류를 드러낸다. 하지만 치밀한 완벽함이 차가운 느낌을 동반하듯, 이러한 그뢰벨의 의도된 노이즈는 기묘한 따뜻함을 내포한다.
그뢰벨은 2000년대 이후부터는 주로 작가 본인이 촬영한 영상의 이미지들을 화폭에 교차시켜 얹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타워 하우스 Tower House>(2005-2006)는 그뢰벨이 1년 반에 걸쳐 런던의 이스트엔드(East End)를 방문해 촬영한 건물의 영상 스틸 이미지의 조합이다. 양쪽으로 2장씩, 그리고 아래로 3장씩 총 6개로 나눠진 사진을 합하면 타워하우스의 형상이 되는데, 그뢰벨은 이를 통해 시간적 요소와 본인의 사적인 경험을 더했다. 이후, 그의 작업에는 보다 회화적인 요소가 많아졌다. 이전에는 멀리서 보면 사진 작품인지 회화 작품인지 다소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영상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겼다면, 최근 2020년대 작업들에서는 색감 있는 배경, 선적인 요소, 선이 없는 빈 여백 등의 회화적 표현이 추가된 점이 눈에 띈다.
이번 비엔날레에 출품된 새로운 연작들은 이러한 그뢰벨의 변화된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한 남성이 턱을 괴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고, 그 남성의 머리 위쪽으로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 풍선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들이 가득 차 있다. 새 연작 중 하나인 <마인드 캔디 그림-이성의 잠 el sueño de la razón[the sleep of reason], from the series The Mind Candy Paintings>(2024) (도판1)이다. 휴대폰 속 스펙터클한 이미지는 어린 시절을 회상시키는 캐릭터, 그리고 부풀어진 무언가들의 합으로 한 남성의 머리 위에서 부유한다. 이때, 지그재그 선들이 만들어낸 곳곳의 공백들은 하나의 노이즈 역할을 하며 이미지를 다소 불명확하게 만든다. 이는 ‘밀도 있는 가벼움’을 자아낸다. 한편, 또 다른 작품 <마인드 캔디 그림-무제 Untitled, from the series The Mind Candy Paintings>(2023) (도판2)는 어딘가를 가고 있는 듯한 선글라스를 쓴 남성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담아냈다. 이때, 인물의 반을 포함한 그림 가운데의 여백은 화면을 분할한다. 나뉜 화면과 그에 따라 희미해진 인물은 마치 또 다른 시공간으로 확장되며 분해된다. 하나의 스틸 이미지에 포착, 즉 포획된 인물은 노이즈 질감의 화면 속에서 역동성을 갖는 것이다.
비엔날레에 제시된 총 8개의 연작들은 모두 100x70cm의 동일한 캔버스에 제작되었다. 또한 도시, 시장을 비롯한 일상의 배경들은 각각 푸른빛, 붉은빛, 노란빛, 초록빛으로 덧씌워졌다. 이때, 이 배경색들은 따뜻한 빛보다 차가운 빛이 더 도는 색들로, 평범한 일상과의 괴리감을 자아낸다. 이렇게 색으로부터 분리된 일상의 친숙함은 각기 크기가 다른 자글자글한 선, 그리고 똑같은 규격의 일련의 캔버스들과 함께하며 더욱 현실성을 잃는다. 분명 일상의 이미지이지만, 차가운 느낌의 배경, 화면 구석구석의 식별하기 힘든 형체나 풍경, 네모난 모양의 지그재그 선, 배경색만 채워진 여백은 마치 현실 세계에서 비현실 세계로 이동할 때의 잡음으로 들린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방영되는 텔레비전 화면을 몽롱하게 시청하기. 일상 속 풍경이나 사적인 관심과 경험을 카메라 화면에 담기. 이미지들을 더듬으며 추적하기. 가장 인상 깊었던 이미지나 텍스트를 포착하기. 캔버스 화면 안에 이 요소들을 구성하기. 기계를 작동하기.
이와 같이 그뢰벨의 작품에는 ‘화면’ 간 접속의 과정이 부옇게 표현된다. 텔레비전, 카메라, 캔버스의 화면들이 서로 교차되며 이루어지는 교신은 일상과 비일상, 의식과 무의식, 서사화와 탈서사화를 오가며 끊임없는 ‘노이즈(Noise)’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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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가희(1994-) ruby6744@naver.com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 현재 삼성문화재단에서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2) 《날씨의 변화 A Change in Weather》, 2022.12.10-2023.02.26, 전시 도록(Booklet), p.4 참고.
3) 작가 홈페이지 - biography - 역대 전시에 대한 정보가 잘 정리되어있다.
4) 두산백과 “노이즈” 검색. 2024.11.18
마티아스 그뢰벨 Matthias Groebel,
<마인드 캔디 그림-이성의 잠 el sueño de la razón[the sleep of reason], from the series The Mind Candy Paintings>,
2024, 캔버스에 아크릴, 100x70cm
마티아스 그뢰벨 Matthias Groebel,
<마인드 캔디 그림-무제 Untitled, from the series The Mind Candy Paintings>,
2023, 캔버스에 아크릴, 100x70cm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