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소피야 스키단: 기묘한 숭고
심재은
“나는 제시불가능한 것(unpresentable)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데 몰두하는 예술을 현대적(modern)이라 부를 것이다.” 1)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는 제시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예술을 숭고한 예술로 규정했다. 이때 ‘제시불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주체의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주체 내부에서 ‘지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있는 것’ 사이에 간극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통과 결합된 쾌(快)이자,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쾌이다.
소피야 스키단(Sofya Skidan, 1996-)의 <아직 제대로 어우러지지 못한 기묘함을 뭐라고 부르지?>(2019-2024)는 이러한 탐구의 과정을 관람자에게 생생하게 제시한다. 2) (도판 1) 이 작품은 비인간 세계, 우주, 분자 세계를 탐구하는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원시 소리(Primordial Sound)’ 섹션의 주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 개의 캔버스 스크린에 투사된 삼부작 비디오로 구성된다. 원초적인 소리를 배경으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나래이션은 관람자를 명상으로 이끈다. 그러나 세 개의 스크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재생되는 강렬한 영상은 관람자에게 불안감 또한 전달한다. 영상 속 퍼포머들은 진흙탕 속에서, 거대한 바위 위에서, 동굴 입구 등에서 기괴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들의 몸짓은 슬로우모션으로 재생되기 때문에 더욱 기묘함을 자아낸다.
퍼포머는 현실의 자연 풍경과 상상의 메타 풍경 사이를 오가면서 현실의 불안정성을 어떻게든 포착하려고 한다. 이는 인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현상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으로 의사소통, 의식의 비언어적 방법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인간은 “의지도, 기억도, 초점”도 없고, 이미 “형성된 이해”로 존재하며, ‘자율적 실체란 없음’을 인식하는 자들이다. 작가는 변화하는 기술과 육체성 사이의 상호관계뿐 아니라 그 결과, 즉 신체의 불안정성, 정체성의 희석, 이로 인한 소외 등을 탐구한다. 그러나 점차 분해되어 가는 퍼포머의 정체성은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이 퍼포머의 실재성을 지시하는 일부 요소만이 관람자를 현재의 순간으로 되돌릴 뿐이다.
영상 속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는 1970년대 남성 예술가들의 대지미술, 신체미술 그리고 미니멀리즘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대지-신체’ 미술을 선보였던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 1948-1985)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인다. 두 작가 모두 자연의 엄청난 힘 앞에서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기보다는 대지와 신체를 융합하여 새로운 우주를 창조한다. 자신의 신체를 주술 그 자체로 사용하기 때문에 퍼포먼스가 하나의 제의(祭儀)로 기능한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난도 높은 곡예를 펼치는 스키단의 작품 속 퍼포머들은 풍경으로부터 끊임없이 변화하고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
한편 영상 속 자연은 언뜻 보면 이상적이지만 동시에 기묘하다. 자연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 아니라 디지털로 만들어낸 이미지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원시적(pristin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역시 변형되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며, 새로운 접근 방식과 소통방식을 요구한다. 스크린 하단에 배치된 촉수는 고무 호스, 철망, 나무줄기 등으로 만든 인공물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서 기어 나온 생명체처럼 보인다. 이는 영상 속 퍼포머의 신체가 연장되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아니 애초에 공중에 매달린 스크린 캔버스 자체가 영상 속 퍼포머의 신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와 같은 자연과 인공의 병치는 관람자로 하여금 기술과 자연 사이의 상충하는 경계를 숙고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방식은 스키단의 회화와 조각에도 적용된다. 보스호드 갤러리(Voskhod Gallery)에서 열린 단체전 《다시 마법에 걸리기 Re-enchanted》(2021)에서 선보인 <초공간 가로지르기 Transverse Hyperspace>(2018)에서 작가는 플라스틱 위에 인쇄되어 구겨진 디지털 사진을 선보인다. (도판 2) 지지체 위에 배치된 사진은 하나의 조각이지만 모서리 하나만 지면에 닿은 채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초공간을 가로지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역동적인 공감각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작품 <당신의 온화한 신체 무기 Your mildly Corporeal Weapons>(2020)에서는 형태를 종잡을 수 없는 덩어리가 등장한다. (도판 3) 이 작품은 철근과 같은 무거운 소재로 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인공적인 빨간색과 파란색 물감으로 칠해져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또한 하단에 부착되어 있는 실리콘 덩어리는 흡사 인간의 치아 혹은 뼈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스키단의 조각은 포착하기 어려운 감각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제시한다.
같은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갇히거나 도난당한 기억을 불러내기 Conjuring trapped/stolen Memories》(2024)에서 작가는 기억의 조작을 다루는 디지털 콜라주와 설치물을 선보인다. 나무, 실리콘, 돌, 플라스틱, 모래, 인간이 만든 것과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것 등 다양한 특징과 기원을 지닌 물체가 서로 녹아든다. 이러한 기념물을 조작함으로써 스키단은 가상과 실제가 구별할 수 없게 혼합된 상상의 풍경을 생성하거나 호출한다. 예를 들어 <비(非)강화 미래 Non-reinforcing Future>(2023)에는 상단의 사막, 중앙의 빙하, 하단의 암석이라는 세 가지 풍경이 등장한다. (도판 4) 매우 사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세 가지 풍경의 병치는 기묘함을 자아낸다. 특히 중앙의 빙하 지역은 위아래가 반전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빙하 풍경의 하늘은 자연스럽게 하단 암석 풍경의 하늘이 된다. 이처럼 작가는 하이브리드 메타 풍경 속에서 대상의 특수성을 제거하고 탈영토화한다. 즉 배경의 디테일은 표백되며, 풍경은 일관되게 구축된 색, 형태, 질감의 미학적 세계에 녹아든다.
소피단 작업에서 주술(conjuring)은 주어진 것을 의도적으로 변형하여 다른 형태와 유사하게 기억이 종속되는 일종의 조작을 암시한다. 스키단은 존재의 모든 흔적을 불러내는 주술의 부정적인 측면과 예상치 못하게 환상적인 조합을 만들어내는 주술의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수행한다. 마침내 주술은 작가의 의지를 넘어서는 물질적, 제도적 요인으로 인해 동일한 망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작가는 자신의 흔적, 즉 “상실을 가리키는 기념 드로잉, 취약성의 문자소(grapheme), 그리고 망각에 대한 저항”을 남긴다. 3)
예로부터 음모론, 신비주의, 점성술 등의 영적 실천은 현실 도피를 위한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예술과 철학은 상상력의 경계와 미래의 유토피아적 지평을 확장하므로 종종 정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왔다.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 예술의 역할은 세상을 재창조하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규칙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예술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닐 수 있을까? 또는 위기 극복을 위한 시나리오를 제시할 수 있을까? 영국의 인류학자이자 사이버네틱스 전문가인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1980)에 따르면 사람들이 주술이라고 칭하는 것은 “생각이 사건(event)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관념이라는 강력한 효과는 스키단과 같은 젊은 세대의 러시아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새로운 세계 건설의 잠재력과 역동성을 이끌어낸다. 이분법의 해체와 그에 따른 대상의 모호함은 현실의 재현 구조에 깊숙이 들어가 지도와 영토가 서로 풀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때 스키단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은유하는 언어로 선택한 것은 ‘신체’이다. 작품에서 물질은 정신과 신체, 인간과 자연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이분법과는 다른 차원에 놓인다. “풀은 죽는다. 사람은 죽는다. 사람은 풀이다”라는 은유적 삼단논법을 펼친 베이트슨의 방식으로 스키단은 인간, 자연, 비-인간의 공존이라는 문제에 접근한다. 4)
디지털 기술은 인간 삶을 확장하고 향상하는 도구이다. 우리는 기술이 우리의 일상을 ‘주술에서 풀려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기술로 인해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더 상징적인 것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현대 기술의 핵심에 내장된 새로운 기술적 마법과 강령은 우리가 그것의 창시자인지 아니면 조작과 마법이라는 힘의 산물인지를 불명확하게 만든다. 그러나 주술은 우리의 인식, 즉 사물이 인간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기술이 인간을 대하고 인간 사이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있다. 그러므로 주술을 생산하는 기술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새로운 형태의 마법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을 곧게 펴고 힘을 실어준다. 스키단을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주술의 기술은 실용적이다. 이는 편리함이나 일상성의 의미가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이다. 예술은 다가올 세상을 구상할 수 있는 연금술적 몸짓으로 옮기는 마법 지팡이로 변모하고 있다.
<아직 제대로 어우러지지 못한 기묘함을 뭐라고 부르지?>로 되돌아가자. 퍼포머들은 자신들의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정의 내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이들은 끊임없이 몸부림친다. 끝내 자신의 신체가 와해되어 사라진다고 해도 말이다. 이러한 실험정신 덕분에 우리는 최신 기술과 다중 감각이 넘쳐나는 스키단의 작품에서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스키단의 기묘한 작업들은 동시대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 심재은 (1990-)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재학. 중남미문화원 병설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했으며, 전후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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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ean-François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78.
2) 소피야 스키단은 1996년 러시아 우흐타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영화 방송 대학(Saint-Petersburg State University of Film and Television)과 로드첸코 모스크바 사진 및 멀티미디어 학교(Rodchenko Moscow School of Photography and Multimedia)를 졸업했다. 작가는 또한 전문 요가 강사로 활동 중이며, 이는 작업 소재·기법·주제 선택에 반영된다. 현재 발리에서 거주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 인스타그램 @sofskidan, 공식 사이트 https://sofskidan.com/)
3) Alexander Burenkov, 《다시 마법에 걸리기 Re-enchanted》(2021) 전시 서문
4) 그레고리 베이트슨 외, 『마음과 물질의 대화』, 홍동선 역 (고려원, 1993), 44.
Sofya Skidan, What do you call a weirdness that hasn't quite come together? 2019-2024.
Three-channel video installation, sound, color, 7 min, 10 min, 12 min.
Sofya Skidan, Transverse hyperspace, 2018, plastic, digital print, UV printing, 60 x 90 cm.
Sofya Skidan, Your mildly corporeal weapons, 2020, wood, silicon, plastic, 20 x 60 cm.
Sofya Skidan, Non-reinforcing future, 2023, digital painting, photocollage UV-print dibond, 100 x 80 cm.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